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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조 Nov 22. 2024

초겨울의 연애 편지를 읽으며

빨라지는 세상이 싫어서

https://youtu.be/DPJL488cfRw?si=wnCfC9E1UZO1HFLk







중학생 시절,

좋아하던 아이가 있었다.


내가 살고있는 곳과 정반대인,

지하철로도 한참을 가야 있는 곳에 사는 아이였다.


어느 날부터 나는

저금통 바닥면에 칼집을 내고

몰래 동전 수십 개를 꺼내어

학원 앞에 있는 공중전화에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공중전화 뱃속으로

동전이 댕그렁 소리를 내며 떨어지면

아이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흘러나왔다.


그는 익숙한 듯

낯선 번호로 걸어도 늘

첫마디에 'OO야? OO 맞아?'라고 되묻곤 했다.


난 그때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얼어붙은 손을 불어가며

그에게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했다.


귤이 좋아, 사과가 좋아?

흐린 날씨가 좋아, 맑은 날씨가 좋아?


어린 나에게 주어진 요금제는

1시간의 통화뿐이었니까.

그 아이의 목소리를 더 오래 듣고 싶어서

나는 굳이 공중전화를 고수했다.


한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나는

엄마에게

학원에서 틀린 문제를 다시 풀다 오느라 늦었다고 둘러댔다.


그 아이와 통화하고 돌아오는 밤길엔

 전봇대의 불빛도 더 밝았다.


길을 걸어가는 도둑고양이에게

더 밝게 인사를 할 수 있었다.


잔잔한 민무늬 같던 삶에서,

그 아이와의 통화만이 색감을 가졌고

전에 없이 느껴지는 기쁨이었다.








"졸려? 아직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데.."

"아니야, 이야기해."



서른 언저리쯤이었을까.

나와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는

밤새 통화하기를 좋아했다.


내일 출근해야 한다는 핑계도,

업무에 지장을 준다는 강박에도

그는 굳이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수다를 떨었다.


여행, 군대에서의 추억, 가족과의 갈등.

그 모든 것들을 쏟아내며

그는 나에게 이해받기를 원했다.


그의 삶이

자꾸만 감기는 내 눈 속으로 침범해 올 때마다

잠과 그와 삶이 혼재되어 흔들렸다.


그러나 늘 그렇듯

연애는

서로의 속도가 달라서 틀어진다.


그는

왜 나만큼 마음의 문을 열지 않냐고,

자기가 어디가 맘에 안 드냐고,

왜 통화할 때 자신만큼의 열정이 없냐고 쏘아붙였다.


열정이 없는 것이 아니고

나는 나의 마음 속도대로 달렸을 뿐인데

어린 시절 공중전화로 달려가던 마음은 아직 아닐 뿐인 건데

그에게 자꾸만 혼이 나고 추궁당했다.


그래서 나는 자꾸

길가에 어딘가 서있는

공중전화로 달려가서 그에게 전화를 해야 할 것만 같은,

그런 느낌에 시달렸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에게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지 않았다.


이제야 말하지만

그와의 통화가

어린 시절만큼 행복하지는 않았다.



서로의 감정을 보채는 일이

그만큼 끔찍한 일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썸남이 2시간째 카톡 답장이 없어요. 이거 썸붕각이죠?"


최근에 후배 한 명이 나에게 물었다.


나는 웃으며 바쁜 일이 있겠거니,

카톡을 보낸 줄 착각했나 보다,라고 생각하라 일렀다.


하지만 후배는

그 후에도 몇 시간 동안이나

얼굴을 구기고 앉아있었다.


실상 그 썸남은 일이 생겨 답장이 늦은 것뿐이었는데.



요즘 연애는

답장은 신속하게

대화는 끊이지 않게

마음이 돌아서 매몰차게 차단

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하루에 한 번,

좋아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연결되어있지 않으면 공포스러워한다는 것이

놀랍고

슬프다.









요즘 나는

작은 독립 서점에서 산

익명의 편지라는 것을 사서 읽는다.


작가들이 익명들에게 보낸 편지를

어느 때고 내가 가서 구매해 읽는 것이다.


지난해부터 산 편지들은

족히 50장이 넘는다.


그리고

올해 늦여름에 산 편지를 열었더니

고운 편지지와 함께

종이 매미가 튀어나왔다.




 

그 매미를 보며

나는 하루종일 기뻤다.


작가와 작가의 어린 아들이

작은 손과 어른 손이

열심히 종이접기를 한 것이 상상이 되어서

행복하고 좋았다.


편지의 내용도 스스럼없고 따뜻해서

읽고 또 읽었다.




나의 마음이 다른 이에게

반드시 지금 당장 도달하지 않아도 괜찮다.


통화로 연결되지 않아도

급하게 마음을 쏟아내지 않아도

괜찮다.



하릴없이 읽을 이를 기다리는 편지들.

그 편지를 썼던 작가님들을 기억하며


세상의 속도가 조금은 느려졌으면,

사랑하는 이들의 속도가 조금만 느려졌으면,

하고 바래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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