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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찬 May 03. 2021

패션 위크의 죽음

디지털 패션 위크와 새로운 패션 문법에 대한 탐구

 현대 패션은 패션이 아닌 패션-위크다! 현대 패션의 문화는 어디까지나 디자이너, 에디터와 같은 패션 엘리트에 국한된 패션 카니발, 즉 패션 위크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패션 엘리트들은 패션 위크를 통해 수많은 스타 디자이너를 탄생시켰고, 스타 디자이너와 그들의 창조물은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 스트리트 웨어의 상징으로서의 버질 아블로, 클래식의 신화로서의 샤넬은 패션 위크가 낳은 자식들이다. 이 수많은 신화는 과거의 테크닉 중심이었던 패션 언어(실루엣과 텍스쳐)를 패션 위크적 언어(샤넬의 클래식! 관능미의 베르사체!)로 변화시켰다.

이 패션 위크적 언어는 또 한 번의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데, COVID-19가 오늘날 패션 위크의 모습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인 팬데믹 현상은 패션 위크를 강제적으로 디지털화시켰고, 엘리트 중심의 배타적 패션 위크는 자연스럽게 민주화되었다. 패션 위크는 더 이상 패션 엘리트에 국한된 문화가 아니다. 즉, 소비자와 패션 브랜드 간의 직접적 소통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는 또한 창의성에 대한 정의를 바꾸어 놓았는데, 디지털 세상 속 범람하는 수많은 이미지는 덕분에 과거에 그것이 가지던 희소성을 없애버렸고, 이제 중요한 것은 새로운 이미지에 대한 발견과 제시가 아닌 이미지의 조합이 되었기 때문이다(창의적인 이미지 조합!). 이런 변화는 당연히 패션 디자이너들의 작업 방식에도 영향력을 미쳤고 패션 위크적 언어 대신 레퍼런스의 조합이라는 새로운 패션 문법을 탐구하도록 만들었다.


최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교체된 지방시의 사례는 이러한 패션 언어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 우아함과 쿠튀르 패션의 정수(패션 위크적 언어)를 보여주던 클레어 웨이트 켈러의 지방시는 매튜 윌리엄스라는 젊은 디자이너를 만나 완전히 현대적인 언어를 말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레퍼런스의 조합이다 (버질 아블로, 뎀나 즈바잘리아와 같은 디자이너들은 이 현대적 언어로 소통하는 대표적 인물들이다). 매튜의 디자인 속에는 헬무트 랭의 글램이 존재했고, 과거 지방시에서 알렉산더 맥퀸이 이야기했던 페티시적 감성이 보였다. 레퍼런스의 적극적 활용은 과거 디자이너의 창조물에 대한 단순 복제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매튜가 이용한 레퍼런스는 어떤 새로운 이미지의 창조를 위함이 아닌 소비자와의 소통을 위한 언어로 이용되었을 뿐이기 때문이다(즉, 이미지라는 언어의 조합을 통한 패션 창조). 과거 헬무트 랭이 창조한 글램에 관한 이미지들은 오늘날 더 이상 하나의 창조적 작품, 창조적 이미지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패션 체계를 구축하는 하나의 언어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글램과 관능이라는 언어! 패션 위크를 통해 얼마나 많은 브랜드와 창조물이 언어화(신화화) 되었는가? 헬무트 랭과 알렉산더 맥퀸의 창작물은 그 패션의 언어체계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언어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현대 패션의 목적은 새로운 이미지의 창조라기보다는 기존의 디자이너들에 의해 형성되었던 신화와 이미지를 이용한 하나의 문장 만들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오늘날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정확히 말하면 이미지 자체가 새로운 것은 불가능하다. 이미지의 조합만이, 즉 이미지가 만들어 낸 언어의 조합만이 새로워질 수 있을 뿐이다. 과거 패션 위크에 의해 만들어진 신화. 브랜드 이미지라는 신화로써의 언어들의 조합. 그것만이 오늘날 창조적인 패션을 만들 수 있을 뿐이다.

매튜 윌리엄스의 지방시 2021 봄 컬렉션 (Photo credit : Vogue Runway)

그 언어의 조합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것은 단지 아름다운 ‘옷’에 대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새로운 패션 문법은 그것의 표현에 있어서 더 자유롭다. 패션 위크적 언어의 한계를 넘어선다. 언어들의 조합을 통해서 아름다움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가능해질 것이다. 즉, 그것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며 미학적 담론인 것이다. 언어의 조합(레퍼런스의 조합)으로서의 패션은 상품으로써의 패션이 가지는 한계점을 드디어 파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껏 패션이 접근할 수 없었던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과거 알렉산더 맥퀸의 그 천재적인 컬렉션을 감상하면서도 우리는 그 컬렉션이 가지는 한계에 대해 얼마나 아쉬워했던가? 이것은 과연 입을 수 있는 옷인지에 대한 물음들… 하지만 맥퀸이 보여주었던 천재적인 창조물을 하나의 레퍼런스로, 하나의 언어로 이용함으로써 wearable 한 담론이 가능해진 것이다. 레퍼런스의 조합으로서의 패션을 통해 오늘날의 시대정신에 대해서 그리고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탐구가 가능해진 것이다. 이 얼마나 멋진 진보인가? 예컨대 헬무트 랭의 글램은 성 정체성의 해체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 있고, 맥퀸의 드레스는 소수자에 대한 권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디자이너의 역할은, 현대 디자이너의 창조성은 과거 디자이너들이 구축해놓은 언어를 현대에 맞게 다듬어 재생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레퍼런스의 조합으로서의 패션은 과거의 디자이너와 현대의 디자이너의 대화 과정인 것이다.


매튜 윌리엄스의 지방시가 고전 디자이너와 현대 디자이너 간의 대화 과정이라면, 에디 슬리먼의 최근 The Dancing Kid 컬렉션은 현대 디자이너와 소비자 간의 대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The Dancing Kid 컬렉션은 기존의 에디가 셀린에서 보여주었던 컬렉션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컬렉션 영상에서는 틱톡에서 주로 나올 법한 음악이 흘러나왔고(힙합), 투 톤 헤어와 자물쇠 목걸이를 이용한 스타일링 등 단번에 E-Boy와 틱토커를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들로 가득했다. 다채로운 프린트의 카디건, 올드 스쿨 스니커즈, 닥터 마틴을 연상시키는 부츠 등 Z-세대의 추억 속에 있는 패션 모먼트들이 각각 하나의 레퍼런스가 되어 셀린의 쇼를 구성했다. 이것은 인스타그램과 유튜브에서 인터넷 유저들이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아이템을 공유하며 연대감을 느끼는 소통 방식을 떠올리게 했다. 특정 시대, 특정 세대를 대표하는 패션 아이템을 하나의 레퍼런스로 이용함으로써 그 아이템은 소비자의 욕망을 자극하는 상품인 동시에 소비자와의 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언어가 되는 것이다.


에디 슬리먼의 The Dancing Kid 컬렉션 (Photo credit : The Glass Magazine)

이처럼 디지털 시대는 오늘날의 패션 시스템에 완전히 다른 태도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요구한다. 그것은 더 이상 상위계층에서 하위계층으로 명령하는 하향식 소통이 아니다. 권위자에 의한 디자이너 신화 만들기 시대는 끝났다. 그것은 전혀 디지털적이지 않다! (패션 위크는 죽었다!) 이제는 새로운 실루엣과 색감을 만드는 것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어떤 레퍼런스를 이용해 어떤 창의적인 이야기를 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것은 제안이 아닌 대화이다. 상호적 대화이다. 그러면서도 공감이 가능한 wearable 한 대화이다. 레퍼런스의 이용과 세련된 조합은 소비자와의 연대감에서 출발하는 진정성 있는 소통을 가능하게 해 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디지털 시대에 적합한 커뮤니케이션 태도가 아닐까?






이미지 출처

Vogue.com

Theglassmagazine.com

Dazeddigit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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