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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화 Sep 17. 2024

14. 보이지 않는 것

수현(3)





제 남편을 가만히 보면, 세상 속 편하게 사는 것 같습니다. 예전부터 그랬습니다. 남편에게도 제 얼음과 비슷한 것 하나쯤 있지는 않을까 눈여겨봤는데, 제가 못 찾는 건지는 몰라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억울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나만 이렇게 힘들게 사나, 사서 고생하면서 사나, 하고요. 


수학이 제 일이기는 하지만 얼음이 들어갈 그 빈자리는 원래부터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려서부터도 그 곳을 대충 직감했습니다. 그 자리를 과연 무엇으로 채울지 고민하며 살아온 겁니다. 그 자리에 사랑하는 사람을 넣은 적도 있고, 자전거 타기나 퍼즐 같은 취미도 넣은 적도 있습니다. 그 자리에 갖가지를 넣어봤는데, 다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너무 가벼워서 더 허전한 느낌이 드는 겁니다. 



그런데 수학은 그 자리에 아주 잘 맞았습니다. 제자리처럼 묵직하게 들어맞았습니다. 물론 항상 품고 다니기 힘들지 않은 건 아닙니다. 처음에는 엄청 힘들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자리에 수학은 계속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완전히 뺄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끝내는 깨달았습니다. 이거구나. 내가 할 일은 수학이구나.


수학으로 가득했던 그 자리에, 성은이를 출산하고 나서는 완전히 아이로 들어찼습니다. 실제로는 제 몸에서 아이가 나갔지만 마치 그 자리에 성은이가 가득 들어온 것 같았습니다. 차가운 얼음과는 느낌이 달랐습니다. 얼마나 좋았게요. 차갑기만 했던 그 자리에 따뜻한 성은이라니, 하루 온종일 품고 있어도 두려운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용기가 샘솟았습니다. 온기 가득한 아이가 내 곁에 있다면, 아무리 차가운 수학이라도 거뜬히 더 잘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이만큼 수학을 했어도 수학 앞에 서면 두려운 건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입니다. 수학자라고 어떤 문제든 척척 푸는 것도 아닙니다. 정말 어려운 문제에는 얼씬도 하지 않습니다. 사실 명제를 증명하기 시작할 때면, 책상 앞에 앉을 때면 매번 무섭고 두렵습니다. 아무리 고민의 시간을 보내도 참도 거짓도, 그 무엇도 보일 수 없을지 모른다는 그 가능성이 저를 따라다닙니다. 그 느낌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실패의 가능성.


언제나 명제와 함께 그 가능성까지 함께 받아들이는 겁니다. 끝내 좌절할지도 모르는 일을 매번 착수하는 겁니다. 사실 세상일이 다 그런 것도 같습니다. 이도저도 되지 않는 것들뿐이니까요.



생과 죽음, 처음과 끝, 그 사이의 모든 것.


그렇게 생각하면 수학은 그나마 괜찮은 것 같기도 합니다. 제가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대상이니까요. 만나는 사람들, 사랑하는 가족도 제 마음대로 되질 않고, 사람 사이의 관계도 제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마음대로 된다면 제가 남편이랑 싸울 일도 없었을 겁니다. 제 뜻은 그렇지 않은데 이야기를 하다보면 예상하지 못한 쪽으로 이야기가 흐르고, 결국에는 서로 지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수학은 올바르고 정확합니다. 


오해의 소지 없는 정의.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논리적인 증명.

자연스럽게 파생되는 성질.

일반적인 차원으로 나아가려는 연역의 시도.


예리하고, 때로는 냉정한 규칙이지만 그대로 따르기만 한다면 수학 안에서는 다루지 못할 것이 거의 없습니다. 제 뜻대로 통제하고 있다는 일종의 편안함과 안정감도 분명 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지금까지 수학을 해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에서야 더 실감합니다. 이 세상은 제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정말 눈곱만치도 없다는 걸.




밤은 깊어가는데 생각은 많아집니다. 잠들기 싫어서 그랬습니다. 저녁에 잠을 자서 그런지 잠도 오지 않습니다. 남편이 조용한 것을 보니 아마 거실에서 잘 겁니다. 저 혼자서 침대를 독차지하고 누워 있습니다. 이대로 잠들면 곧장 내일이 되고 맙니다. 사실 내일은 성은이 기일입니다.


첫 기일.


제가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또 이럴 때는 곁에 남편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 곁에 누구라도 없었다면, 저는 아무도 모르게 무너지고 말았을 겁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면서요. 순 거짓말입니다. 이래서 제가 수학의 명제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조건과 상황까지 정확히 서술해서 언제 맞는지, 언제는 틀리는지, 왜 차이가 있는지, 끝까지 파고듭니다. 수학자들은 절실하게 그런 일을 합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 


멋은 있지만 얼마나 무책임한 문장인가요. 지금 제게는 해당하지 않습니다. 너무도 쉽게 저는 반례가 됩니다. 그래요. 어쩌면 사람은 결국 잊기 때문에 기일을 챙기는 것이 아닐까요. 잊은 것을 다시 기억하려는 의도로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 하나도 잊지 못했는데, 기일을 챙긴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제게는 매일 매일이 기일인 셈인데 구태여 다른 날과 구분해서 기일을 챙겨야 한다니, 성은이를 보러 가야 한다니. 가슴의 떨림이 그칠 줄을 모릅니다. 가슴 한 편이 시큰하고 먹먹합니다.



잠자기는 글렀습니다. 잠에 들지 못하더라도 눈을 감고 누워 있어야겠습니다. 스탠드를 켜고 베개와 이불의 위치를 알맞게 고칩니다. 최대한 편안한 자세를 찾기 위해 몇 번이나 어깨를 들썩입니다. 움직임을 멈추자 새벽의 낯섦이 불현 듯 찾아옵니다. 깊은 허무함에 사로잡힙니다.


안락한 침대, 남편의 수면을 위해 건 암막커튼, 모퉁이에 놓인 작은 책상과 의자, 밝은 고동색의 장롱, 이 모든 것들은 이 집에 들어올 때부터 자리했습니다. 저와 함께한 오랜 시간이 무색하도록 방안이 생경하기만 합니다. 스탠드의 조명에 비친 은근한 그림자도 제 것이 아닌 듯 생소합니다. 괜히 팔을 들어 올려 제 그림자가 맞는지 확인해 봅니다. 모든 것이 의심스럽습니다. 어디 멀리, 아주 오랫동안 멀리 떠났다가 방금 돌아온 듯합니다. 


홀로 남은 기분.



나는 누구지. 나는 여기 왜 있지. 이 세상은 어디지. 왜 이토록 낯설지. 주변에는 익숙한 것들뿐인데, 가슴이 뛸 정도로 제 자신과 침실이 어색합니다. 저는 암막커튼을 한쪽으로 거두고 창밖을 내다봅니다. 평소와 다른 점을 찾기 위해 엷은 가로등 불빛 아래를 탐색합니다. 기억을 더듬으며 현재와 과거를 비교합니다. 눈에 띠게 다른 부분을 찾아야만 마음이 놓일 것 같은데, 이 세상은 이전과 그대로입니다.


생생한 심장박동을 실감하는데도 지칩니다. 쉬이 태블릿을 들어 아무거나 찾아봅니다. 문득 박연호 선생님과 나눈 대화가 떠오릅니다. 이미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 수학의 대상들을 그는 새롭게 설명했습니다.


뫼비우스의 띠, 원환체, 크로스 캡, 보로메오 매듭과 무의식. 


정신분석이라는 단어와 함께 검색하기 시작합니다. 연구 논문과 관련 에세이가 나옵니다. 손이 가는대로 들어가 내용을 읽어 봅니다. 박 선생님이 하신 말씀과 비슷한 내용인 듯한데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듭니다. 처음 보는 용어의 정의를 찾아 읽어봅니다. 제가 수학의 정의에 길들여져 있나 봅니다. 모호한 정의를 읽자 머리가 더 복잡해지기만 합니다. 제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여러 인상들이 남습니다. 꽤나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전공이 아닌 분야는 항상 어렵습니다. 그래도 이것저것을 읽어가며 적당히 시간을 때울 수 있었습니다. 어느새 살짝 열린 커튼 사이로 흐릿한 빛이 들어옵니다. 날이 서서히 밝아옵니다. 스탠드를 끄고 눈을 감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또렷한 어둠 속에서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 정신분석학자의 마음을 알 것만 같습니다.


지금의 제 마음처럼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절박하게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사실 우리는 누구나 보이지 않는 것을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까요. 그도 보이지 않는 것을 너무도 보고 싶지 않았을까요. 아니, 어쩌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시도를 더 이상 하지 않으려고 한 것일까요. 앞뒤가 엉킨 문장들이 머릿속을 헤집습니다.


잡념을 내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욕실로 들어갑니다. 거울에 비친 저를 봅니다. 눈이 퀭하고, 눈 밑도 거무죽죽합니다. 거울 속에 있는 저와 가만히 눈을 마주치다가 눈을 질끈 감습니다. 이런 몰골로 성은이를 볼 수는 없습니다. 욕조에 뜨거운 물을 틉니다. 차오르는 욕조를 멍하니 기다립니다. 증기가 욕실을 가득 채웁니다. 거울에도 김이 서립니다. 금세 시야가 뿌옇습니다. 호흡도 분명해집니다.



수압이 오르는 소리. 물이 떨어지는 소리. 


제 주변은 분주하게 움직이는 듯합니다. 저는 그 가운데서 성은이를 잠시 떠올리고 맙니다. 성은이도 참 좋아했습니다. 따뜻한 욕조에 함께 몸을 담그고 한참동안 불리는 일. 제게 가만히 몸을 기댄 채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떨던 수다. 그 작은 손으로 치던 가벼운 물장난. 그런 것들이 수증기와 함께 욕실 안으로 둥둥 떠다니는 듯합니다. 손을 뻗으면 금방이라도 닿을 수 있을 것처럼.


욕조가 차자마자 물을 끕니다. 정적 속에서 욕조 안으로 몸을 눕힙니다. 욕조 속은 아주 넓고, 아주 깊습니다. 욕조를 혼자 차지했습니다. 어깨와 다리를 주욱 폅니다. 피로한 몸이 물과 함께 흔들리며 흐물흐물 녹는 듯합니다. 숨을 깊이 머금고 머리끝까지 물속에 집어넣습니다. 눈을 질끈 감습니다. 온몸이 빠짐없이 따듯합니다. 귀는 먹먹합니다. 숨을 쉴 수 없지만 몹시 편안합니다. 두꺼운 이불을 가슴 위에 덮은 것처럼 만족스러운 압박감이 느껴집니다.




이렇게 잠수한 채로 오래도록 잠들고만 싶습니다.





15. 최초의 자살 _ 진영의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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