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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화 Sep 19. 2024

15. 최초의 자살

진영(1)





살면서 자살을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이 있을까. 장담하건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내가 처음 자살을 떠올렸을 때는, 그 생각이 잠시 스쳤다는 것만으로도 남몰래 감행한 불장난을 들킨 듯 화들짝 놀라 하루 종일 죄책감에 휩싸였다. 그 불길 속에서 본 적도 없는 어머니를 떠올렸고, 속절없이 오르는 미안함에 마음 여기저기가 덴 듯했다. 속이 순식간에 달아올라서 내게 아주 큰일이 난 줄로 알고는 그 비밀스런 그을음이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비춰질까봐 노심초사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됐지만, 우리 모두가 살면서 한번쯤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생각을 하며 적당히 숨기기도 한다. 


우리 모두에게 최초의 자살이 있다. 






어렸을 때의 일이다. 눈이 내리는 추운 날이었다. 전날부터 내린 눈으로 세상이 하얘진 날, 그날 보육원 아이들은 아침 식사가 끝나자마자 앞뜰로 달려 나갔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을 가장 처음 밟겠다고 서로 다투며 뛰어다녔다. 나는 또래들 중에서 가장 나중에서야 밖으로 나갔다. 


이미 발자국이 가득한 눈밭.


눈이 많이 와서 발목까지는 거뜬히 올라왔던 것 같다. 아이들은 서로 눈을 던지며 한참이나 놀았고, 나는 그 모습을 멀거니 지켜보았다. 나에게 눈이 날아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눈을 뭉쳐 던지고 싶지도 않았고, 눈덩이를 맞고 싶지도 않았다. 아이들은 눈을 맞아도 즐거운 듯, 서로를 쫓고 쫓기며 돌아다녔다. 갑자기 하늘에서 아이들의 발자국을 지우려는 듯 다시 눈이 내렸다. 재생되는 눈밭과 반복되는 싸움 끝에 결국 아이들은 지쳤는지 하나씩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더니 하늘의 눈을 가만히 맞았다. 아이들의 머리와 어깨 위로 눈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아이가 불쑥 일어나 눈을 크게 뭉쳐 눈밭 위로 굴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아이들도 똑같이 눈덩이를 굴리기 시작했다. 눈은 부족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부추기듯 눈은 내렸다. 누구나 충분히 쓸 정도로 눈은 많았지만, 아이들은 서로 경쟁하듯 눈을 굴렸다. 어떤 아이는 다른 아이가 열심히 굴려 모은 눈덩이를 발로 짓밟아 깨부수기도 했다.



멀거니 앉아 있던 나도 일어나 그들과 적당히 떨어진 곳에서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 뭉치기가 어려웠지, 한 번 모양을 잡은 후에는 눈을 불리기 쉬웠다. 아이들과 나는 눈을 맞으며 할 수 있는 만큼 큰 눈덩이를 두 세 개씩 만들어 각자 자신만의 눈사람을 만들었다. 서로의 것을 눈으로 힐금거릴 뿐 다른 사람을 도와주려는 아이는 없었다. 오직 자신의 눈사람에 집중했다. 


주변의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어와 눈사람에게 이목구비를 만들어주고, 팔과 다리를 부여했다. 눈밭 위에는 아이들의 수만큼 눈사람이 자리했다. 각자의 눈사람은 만든 아이를 빼닮은 듯도 했다. 홀쭉이는 홀쭉이 눈사람을, 뚱뚱이는 뚱뚱이 눈사람. 어떤 모양이었든 모두가 뿌듯한 마음으로 자신만한 눈사람을 완성했다. 아이들의 눈사람은 옹기종기 모여 있었지만, 나의 눈사람은 조금 떨어져 있었다. 내 눈사람은 경쟁에서 벗어난 상태였기 때문인지 그 중에서도 몸집이 컸다. 나는 흡족하게 나의 눈사람을 바라보았다. 누구의 것보다 가장 크고 멋진 듯했다. 내심 만족스러워 눈사람을 몇 바퀴 돌며 여기저기를 토닥였다. 


눈이 서서히 멎을 즈음, 갑자기 떨어진 선생님의 불호령에 아이들은 눈사람을 남겨두고 건물로 뛰어 들어갔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나 홀로 밖으로 나갔을 때, 나는 몰래 찔끔 울고 말았다. 눈사람의 자리를 잘못 잡은 탓이었다. 나의 눈사람 위로 가장 먼저 볕이 들어 녹아 사라진 것이었다. 반면 아이들의 눈사람은 서로를 지켜준 듯 거뜬히 서 있었다. 그들의 눈사람 위로는 두꺼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속상한 마음으로 사라진 눈사람 위에 섰다. 내리쬐는 빛 안에 서서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커다랬던 눈덩이는 바스러져 작은 눈덩이 여러 개로 나뉜 상태였다. 형체를 알 수 없이 녹아 물이 되고 있었다. 심지어 물은 검고 지저분했다. 나는 응달과 양달의 경계를 따라 눈을 돌리다가 어둑하고 추운 곳에 모인 눈사람 군단을 속상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그들의 것은 근사했다. 하나하나가 듬직하고 컸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내 눈사람의 일부였던 작은 눈덩이들을 발로 잘게 부수었다. 처음부터 나의 눈사람이 눈밭 위에 없었던 것처럼 감쪽같이 제거했다. 그 후에 눈사람이 있던 그 자리에서 빛을 받으며 잠시 서 있었다. 추운 날에 따스한 햇볕이 정말 미웠다. 나는 눈 주위를 소매로 훔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건물로 들어갔다.



그날 밤에 또 눈이 펑펑 내렸다. 창에 붙어 쏟아지는 눈을 바라보며 내일 다시 만들 눈사람을 생각했다. 오늘보다 더 크고 멋있는 눈사람, 눈사람 군단과 맞붙어도 지지 않는 그런 강한 눈사람을 꿈꾸며 이부자리에 누웠다. 아주 긴긴 밤이었다.


아침이 밝았고 식사를 마친 후에 아이들은 약속한 듯이 앞뜰로 뛰쳐나갔다. 눈밭 위에는 눈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아이들은 어제와는 달리 눈밭에 발자국을 남기지도, 서로 눈싸움을 하지도 않았다. 모두가 곧바로 눈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서로의 눈사람을 부수지도 않았다. 정정당당히 오직 자신만의 눈사람을 키웠다. 그렇게 자란 눈사람은 다들 어제보다 몸집이 더 컸다. 나도 그들의 노력에 질세라 눈을 한데 뭉쳤다. 밤새 꿈꾼 눈사람을 상기했다. 어제의 기억을 바탕으로 자리도 다시 잡았다. 볕이 가장 나중에 드는 곳을 선점했다. 


눈덩이를 굴리며 생각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크게. 힘들지만 조금만 더 굴리자. 대왕 눈사람을 만드는 거야. 가슴이 뛰었다. 커다란 눈덩이를 하나씩 만들어 힘겹게 쌓아 올렸다.



어제처럼 눈밭 위에는 아이들의 눈사람이 자리했다. 그들은 자신의 눈사람을 다른 아이에게 자랑하느라 불러대고 당기고 소리치기 바빴다. 하지만 어느 하나 서로 인정해주지 않았고, 자기가 만든 눈사람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 착각이 우스웠다. 누가 봐도 내 눈사람이 가장 크고 근사했다. 내가 바랐던 것처럼 그들의 눈사람 군단이 모두 덤벼도 거뜬한 눈사람의 형상이었다. 나의 눈사람 대왕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구태여 자랑하지 않아도 모두가 내 눈사람을 몰래 훔쳐보았다. 나는 눈사람 곁에 모른 척 앉아 그 시선을 충분히 느끼고 만끽했다. 역시나 내 눈사람이 최고였다. 내 손으로 만든 눈사람은 가장 안전한 곳에 서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실내 일과를 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눈사람 생각뿐이었다. 분명 자리를 제대로 잡았지만, 혹여나 어제처럼 햇볕에 몸이 녹아 사라질 것처럼 불안하고 초조했다. 괜히 창가로 다가가 눈사람 대왕을 몇 번이나 살폈다. 창 너머로 보아도 나의 눈사람이 단연 돋보였다. 가끔은 아예 밖으로 나가서 눈사람 대왕의 몸을 단단히 보강했다. 혹시나 부스러진 부분은 없는지 꼼꼼하게 살폈다. 볕은 저 멀리서 비추고 있었다. 눈사람 군단이 모두 녹은 후에도 마지막까지 눈사람 대왕은 꿋꿋하게 살아남을 것이었다.


점심시간 직후, 창가로 다가가 앞뜰을 바라볼 때 내 눈을 의심했다. 또래 셋이 나의 눈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일말의 망설임 없이 발길질을 퍼붓기 시작했다. 눈사람 대왕은 미소를 지을 뿐, 아무 저항 없이 그 공격을 모두 받았다. 몸통은 부서져 나가고 구멍이 뚫렸다. 희기만 했던 몸통이 검게 변했고 물러졌다. 한 아이는 주먹으로 눈사람 대왕의 얼굴을 가격하고 나뭇가지로 된 팔을 빼냈다. 눈사람을 잘게 해체했다.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순식간에 어제의 모습처럼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바스러졌다. 



아주 깊숙한 그늘 위였다. 절대로 녹을 일이 없는, 가장 끝까지 남아 있을 곳이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살아남을 눈사람이었다. 하지만 나의 눈사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아팠다. 내가 맞은 것처럼 몸 여기저기가 쓰라렸다. 그들의 폭행을 숨죽여 목격하고 나서 부리나케 앞뜰로 달려갔다. 세 아이는 일을 끝내고 이미 들어오는 중이었다. 팔다리에는 하얀 부스러기가 묻어 있었다. 뺨은 빨갛게 물들었고, 눈과 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를 마주하고도 보란 듯이 무시하고 지나쳤다. 그들이 원망스러우면서, 동시에 나 스스로가 너무도 싫었다. 그 모든 폭력을 알면서도 그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나는 너무도 못난 아이였다. 단지 주먹을 불끈 쥐고 거친 숨을 삼킬 뿐, 지나쳐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결국에는 몸을 돌려 나의 눈사람이 있던 자리로 달려갔다. 


볕이 들지 않았지만 검은 물이 흥건했다. 작은 눈덩이들이 파편처럼 주변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 자리에 서서 눈사람 군단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모두 나를 흘겨보는 듯했다. 나를 우습게 생각하는 듯했다. 그때, 그 자리에서, 그들 앞에서 나는 정말이지 죽고 싶었다. 죽음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어린 나는 그런 생각에 골몰했다. 내가 없어도 괜찮지 않을까. 내가 죽어도 괜찮지 않을까. 죽고 싶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처음으로 자살을 생각한 순간이었다.



날이 추워 입김이 눈에 보였다. 내 속은 화끈거렸고 식을 줄 몰랐다. 숨을 멈추면 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 자리에 서서 무작정 숨을 참았다. 처음에는 참을 만했는데, 점차 숨이 가빠오더니 가슴이 무겁게 울렁거렸다. 나의 의지로 신체에 저항했다. 


그냥 죽어, 죽으라고, 그냥 죽어버려. 세상에 왜 태어난 거야.


몸의 모든 세포가 산소를 간절히 바랐다. 호흡의 본능이 나를 압도하기 시작했지만 한 손으로는 코를 쥐어 막고, 한 손으로는 입을 막았다.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손으로 호흡의 구멍들을 틀어막았다. 얼굴이 터질 것 같았고, 몸속의 뜨거운 물이 눈 위로 솟구치는 듯했다. 나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내며 악착같이 버텼다. 가슴이 등에 붙을 것만 같았다. 죽을 것만 같았다. 모질게 숨을 가두었지만 결국 본능의 승리였다. 


나는 나를 죽일 수 없었다. 아주 신선한 공기가 폐로 단숨에 들이쳤고, 나의 몸은 살기 위해 거친 호흡을 반복했다. 입김이 모락모락 올랐다. 속은 메슥거리고, 의식은 멍했다. 속은 더 이상 뜨겁지 않았지만 매캐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 텁텁한 향이 인중 주변에서 계속 맴도는 듯했다. 따사로운 햇살이 눈사람 군단 바로 옆까지 들어와 고운 눈밭 위에서 깨진 유리조각처럼 반짝거렸다.






16. 굴레의 연속 _ 진영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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