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선의 교점 # 03

by 청화

스무 살은 이상한 나이였다. 이십에서 열아홉을 빼면 고작 하나이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은 그 하나를 열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나를 갑자기 사회의 일원으로 마땅히 받아들이려는 듯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열여덟이나 열아홉이나 스물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느 때나 갈 곳은 미리 정해졌고, 나는 그대로 따랐다. 학교의 위치만이 바뀌었을 뿐, 학창 시절처럼 매번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집은 서울 서쪽, 언덕 위에 자리한 빌라촌 한가운데였다. 방 두 개와 작은 거실 하나, 화장실 하나가 딸린 집이었다. 고등학생 때 언덕 위로 이사를 왔는데, 이삿날을 돌이켜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산더미처럼 쌓인 어머니의 짐이었다. 어머니가 길바닥에서 쓸 만한 물건을 주워 집으로 들이는 취미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집에 그토록 많은 물건이 있는지 그때 처음 알았다. 가지각색의 유리병, 낡아 바라진 책, 다양한 크기의 손가방, 정체를 알 수 없는 온갖 잡동사니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 물건들은 그대로 새집 안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규모에 압도되었지만, 어머니의 표정은 오히려 밝았다. 놀랍게도 그 많은 물건들은 어머니의 노동으로 하루아침에 깔끔하게 정리됐다.


반면 내 방에는 책꽂이가 딸린 책상 하나, 컴퓨터, 옷장 하나, 거울 하나가 들어왔다. 옷도 별로 없고 책은 아예 없어서 그다지 정리할 것도 없었다. 이삿날 방 정리를 마치고 어머니의 청소가 끝나기를 기다리다가 지쳐 결국 홀로 집을 나와 동네를 둘러봤었다.


동네의 지형은 뜬금없었다. 역에서부터 줄곧 평지가 이어지다가 골목으로 조금 들어서면 갑자기 언덕이 나타났다. 경사는 꽤 가팔랐다. 처음에는 길을 오르고 내리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언제부턴가 숨이 차지도 않았다. 길가를 구경할 여유도 생겼다. 언덕길에는 집이 많았지만 사람들의 왕래는 드물었다. 가끔은 빌라 모두 빈집은 아닐지 의심스럽기도 했는데, 밤에 언덕을 오르면 창문은 빠짐없이 밝았다. 아마도 다들 나보다 이른 시간에 언덕을 내려가고, 더 일찍 집으로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한동안 언덕에서 사람을 발견하면 신기한 마음으로 그들의 얼굴을 빠짐없이 살펴보았는데, 표정은 언제나 엄하고 지쳐 보였다. 고된 얼굴을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모든 이의 얼굴을 면밀히 뜯어볼수록 하나의 표정을 찾을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도 사람들의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쯤에는 언덕길에서 사람들의 얼굴을 일부러 보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통학이 가능한 대학에 입학했다. 어디까지나 가능하기는 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1시간이 더 걸렸다. 하루 24시간 중, 2시간 30분을 길 위에서 보내는 꼴이었다. 아주 긴 시간이었다. 책을 읽거나 주변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그 시간을 흘려보냈다. 매일 같은 시간에 비슷한 사람들과 함께 지하철을 탔다.


내가 하루를 시작하는 방식은 거의 같았다. 어머니의 알람이 어김없이 새벽 여섯 시에 울리면 나도 방에서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그 시간에는 소리가 더욱 생생하게 들렸다. 가만히 누워 귀를 기울이고 어머니의 거동을 살피는 게 버릇이 된 지 오래였다. 매번 똑같았다. 어머니는 냉큼 일어나 몸을 씻은 후에 거실로 나왔다. 곧바로 숟가락과 젓가락이 식탁 위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가 났다. 나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볼 뿐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아침이 나의 새벽으로 들이쳤다. 어머니의 소란을 듣고 싶지 않았지만 방 너머에서 계속 소리가 넘어왔다. 어머니는 식사를 끝낸 후에 반찬 그릇을 냉장고에 넣었다. 유리그릇이 냉장고 선반 위에 떨어지면서 날카로운 소리가 거듭 들렸다. 곧 어머니는 상다리를 하나씩 탁탁 폈다. 그리고는 자리에 앉아 성경말씀을 읽었다. 마치 내게 들리도록 일부러 크게 말하는 듯했다. 나는 방에 누워 하릴없이 듣고 있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아멘. 베드로전서 일 장 칠 절 말씀.”


말씀을 읽고 어머니는 중얼중얼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평온한 구간이었다. 내가 일어날 시간은 아직 1시간 정도가 남았다. 어머니가 기도를 드리는 동안 나는 선잠에 들었다.


잠시 후, 어머니가 방 앞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


“굶지 말고 김밥 먹고 나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는 척을 했다. 아마 어머니도 내가 잠들어 있으리라 생각할 것이었고, 그럼에도 소리친 것이었다. 곧이어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집은 조용했다. 나는 다시 잠에 들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이부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어머니와 함께 하루를 시작하면 될 일이지만, 어쩐지 일어날 힘이 나지 않았다. 나는 그냥 눈만 뜬 채로 멀뚱히 누워 있었다. 그렇게 누워 있다가 머리가 지끈거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방에 불을 켜고 멍하니 책상을 바라보았다. 책을 읽고 싶은데, 집에 책이 없었다. 불과 몇 달 전에는 읽고 싶은 책이 있을 때마다 고등학교 도서관에서 대여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 도서관에 갈 수 없는 신분이었다. 나는 불현듯이 책가방 속을 뒤졌다. 내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전공 과제를 꺼냈다. 마음을 다독이듯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어려웠다. 도대체 어떻게 푸는 걸까. 나는 한참을 과제와 씨름하다가 연필을 내려놓고 방을 나왔다. 싱크대 위에 은색 포일에 쌓인 김밥이 있었다. 어머니의 분식집에서 어제 남은 것이었다. 나는 은박지를 뜯어 김밥 하나를 입에 넣었다. 차게 식은 김밥을 씹어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