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선의 교점 # 02

by 청화

지금 떠오른 첫 기억.


나의 스무 살이 지나는 늦은 가을, 그날의 어린이대공원에도 비가 내렸다. 가을과 겨울 사이의 유독 차가운 비였다. 그녀와 나는 투명한 우산 하나를 같이 쓰고 공원을 걸었다. 나는 우산을 들었고, 그녀는 나의 팔뚝을 가볍게 감쌌다. 우리는 서로의 몸에 기댄 채로 방황하듯 빗속을 걸어 다녔다.


나의 이름이 들렸다. 빗소리에 묻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였다.


“영수야, 너 여기 왜 그래?”


왼쪽 손등에 예리하게 긁힌 자국이 벌겋게 올라 있었다.


“잘 모르겠어.”


“몰랐어? 이런 상처가 났는데?”


“가끔 그래.”


“너도 모르게 여기저기 긁힌단 말이야?”


“그래. 갑자기 어딘가 따끔거리는 거야. 그러면 나는 쓰라린 부위를 찾아. 그럼 진짜로 거기에 나도 모르는 상처가 있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언제 어디서 긁혔는지 알 수 없는 그런 상처. 넌 그런 적 없어?”


“나는 그런 적 없어.” 나의 상처를 안쓰러운 듯 바라보았다. “잘 생각해 보면 언제 다친 건지 알 수 있던데.”


“너무 걱정하지 마. 가끔 있는 일이야.”


“이제는 내가 꼼꼼하게 살펴볼게, 네 몸을.”


“수진이 네가?”


“네가 알기도 전에 내가 찾아내는 거야.”


“그래도 어디서 다쳤는지 알 수 없지 않아?”


“그래도……” 수진은 우울한 낯빛을 띠었다.


나는 바로 답했다. “그래, 대신 찾아줘. 그러면 어디서 난 상처인지 기억날지도 모르잖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걸 너는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렇지?” 수진은 씁쓸한 미소를 짓고 말을 붙였다. “집에서 약 발라 줄게.”


“응, 집에 가서. 지금은 별로 아프지 않아.”


“그럼 조금 더 걸어도 돼?”


우리는 흙길을 피해 깔끔한 길을 골라 계속 걸었다. 주변은 한적했다. 좁은 길로 들었다가 마주 편에서 오는 행인을 피하기 위해 수진과 나는 한 줄로 걸었다. 나는 수진의 머리 위로 우산을 움직였다. 나는 비를 잠시 맞았고, 행인과 나의 우산이 맞부딪혀 물방울이 사방에 튀겼다. 행인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뒤로 사라졌다. 내가 다시 우산 아래로 얼른 몸을 넣자, 수진은 내 팔뚝을 감쌌다.


빗소리와 발소리만이 간지럽게 반복됐고, 그 사이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비 오는 날, 산책이 좋아.”


그 이유를 물었다. 수진은 말없이 빗속을 걸어 좁은 길을 빠져나올 쯤이 돼서야 다시 입을 뗐다.


“바깥에 나와 있지만, 혼자 있을 수 있어서.”


“옆에 내가 있어도 괜찮아?”


“나는 네가 필요해.” 수진이 팔짱을 힘 있게 끼며 말했다. “정말로 혼자가 되면 사실 무섭거든. 그동안 생각해 봤는데, 너랑 있으면 나는 거의 혼자인 것 같아. 나쁜 뜻은 아니야. 너는 절대로 나를 외롭게 하지는 않아. 음……. 그래, 그거야. 너는 내가 어느 날 혼자 있고 싶다 해도, 그냥 알았다면서 잠시 자리를 비켜줄 사람이라는 걸 알아. 뭔가 그 여지가 나는 좋아. 그 시간과 공간까지 내 것으로 생각해 주는 사람 같아서.”


“그렇게 얘기하니까 근사하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너는 혼자 있고 싶을 때 없어?”


“있어. 지금도 많은 시간을 혼자 보내지만, 항상 부족한 느낌이야.”


“사실 우리는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야 혼자 있을 수 있었잖아. 돌아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잠시라도 있었는지 모르겠어. 나는 한순간도 없었던 것 같거든.”


나는 몹시 어렴풋한 과거의 기억을 더듬거렸다. “나도 마찬가지야. 물론 나도 수진이 너를 두고 말하는 게 아니야. 너랑 같이 있으면 편해, 혼자 있는 것처럼.”


수진이 머리를 기울여 내 어깨에 기댔고 우리는 계속 걸었다. 우리의 몸이 침묵 속에서 규칙적으로 흔들렸고, 오를 때마다 달콤한 샴푸향을 났다.


나는 망설이다가 입을 뗐다. “왜 혼자 있고 싶은 거야?”


수진은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 시간 동안 나는 그녀가 내 곁을 떠난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단지 혼자 있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방 안에 틀어박혀서 혼자 있고 싶지는 않아. 그러면 나한테 허락되는 세상은 고작 작은 방 하나가 전부잖아. 나는 그런 걸 원하는 게 아니야. 나는 더 넓은 세상을 누리면서 살아가고 싶어.”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알겠어?”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수진은 속삭이듯 말했다. “고마워.”


“별게 다 고맙대.”


“별 거라니? 영수야 그거 별 게 아니야. 내가 이런 말하면 주변에서 이상한 소리나 한다고 얼마나 뭐라 하는데. 누군가의 얘기를 듣고 이해해 준다는 거, 쉬운 일이 아니잖아.”


“너한테 뭐라고 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아?”


“셀 수도 없이 많아. 나는 이제 상처받기 싫어.” 수진은 나의 왼쪽 손등의 상처를 내려다보는 듯했다. “보이지 않지만 내 마음은 상처투성이야. 덮어놓고 아물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걱정되는 거야. 자꾸 손대고 들쳐보다가 이제 곪고 덧나기까지 해. 계속 아프고 따끔거려. 나도 어디서 누구한테 그렇게 많은 상처를 받았는지 모르겠어. 때로는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날 지경이야. 그럴 때면 나는 꾹 삼켜. 삼키고 삼키면 가슴 안쪽 끝이 저릿한 순간이 생겨. 그때는 나도 어쩔 수 없이 울어 버려.”


빗속에서 나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저 수진을 바라보고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빗소리 사이로 수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 세상 사람들은 굳기와 무르기를 서로 실험하고 있다고. 내가 긁히는지 다른 사람이 긁히는지, 내가 상처가 나는지 다른 사람이 상처가 나는지 말이야. 나는 그런 거 이해할 수가 없어.” 수진은 화가 난 듯 말을 이었다. “단순히 긁어보고는 자신이 상처가 나지 않으면 무슨 강자처럼 굴고, 자기가 상처가 나면 겁에 질려서 어쩔 줄 몰라 해. 그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전혀 몰라서 그래. 자기가 어느 정도로 강한 인간인지 살면서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별 생각 없이 긁어보는 거야. 그런데 누군가는 상처를 받고 있어, 안 그래?”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빗소리를 뚫고 목소리를 내었다. “창피한 얘기인데, 어릴 적부터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물었어. 아니. 하늘을 보고 누군가에게 계속 물었어. 내가 얼마나 단단해져야 하죠? 도대체 제가 얼마나 단단해지기를 바라는 거예요? 이보세요, 저는 더 이상 단단해질 수 없어요. 이제 한계라고요. 지금 나는 너무 힘들다고요. 이제 좀 그만 하세요, 라고.”


“어린 영수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수진은 손가락 끝으로 내 손등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따끔거렸다. 통증과 함께 속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 명치쯤에 닿았지만, 침과 함께 꿀꺽 삼켜 내렸다. “그래도 영수 너는 네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사람은 아니야. 그건 내가 확실히 알아. 너는 다른 사람이랑 달라.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불안에 떨지만 너는 그렇지 않잖아.”


“잘 모르겠어.”


“사람들은 조금도 기다리지 못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아. 시간이 지나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까지 한시도 참지 못하고 말이야. 때로는 서로 아무 상처도 나지 않으면 오히려 사람들은 두려워하는 거야. 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왜 아무도 상처가 나지 않지? 불안해하는 거지. 사실 그건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는 증거인데. 아주 만나기 힘든 사람인데, 그걸 알아보지도 못하고 놀라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로에게서 도망치는 꼴이야.”


수진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내 앞에 마주 섰다. 그녀의 뒤로 비가 내렸고, 우리의 곁으로 우산을 타고 흐른 빗물이 떨어졌다.


“영수야, 나는 우리가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해. 너랑 있으면 나는 상처받지 않아. 너는 상처를 줄 생각도 없겠지만 말이야. 너는 어때? 나 때문에 상처받은 적 있어?”


나는 상처를 입었을까. 그녀가 내 곁에 없었던 시간을 떠올리다가 입을 뗐다.


“아니, 없어.”


나는 대답과 별개로 그녀가 나보다 훨씬 강하고 단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굳센 인간.


“이제 더 단단해져야 한다거나 하는 그런 생각은 이제 하지 마. 알았지? 너는 이미 충분해. 설령 우리가 서로 강하게 부딪혀도 우리는 닳지도 않을 거야. 서로 상처로 받아들이지도 않을 거야. 우리는 같은 부류의 사람이니까.”


우리는 눈을 마주쳤다. 우산 아래에서 서로의 몸을 끌어안았고 입을 맞추었다. 긴 시간을 들여 서로를 허용하고 확인했다. 그녀의 입술과 혀는 무엇보다 부드러웠다. 빗방울이 우산을 쉴 새 없이 두드렸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 나는 분명 달랐다. 피부 곳곳에서 구심력이 일어 중심으로 응축하는 힘을 느꼈다. 이전의 나보다 더 굳세고, 어떤 문제든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만 같은 내밀한 의지도 솟았다. 생생한 감각이었다. 그러나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을 돌이켜보았을 때, 그녀에 대한 나의 기억을 모두 믿을 수 있는지 자신이 없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수진을 만났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비 내리는 공원에서 입을 맞춘 그녀가 수진이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 마치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기억이 뒤틀리는 기분이다. 문득 스친 의심의 조각은 기억 속의 모든 곳에 영향을 준다. 균열을 일으킨다. 아주 손쉽게 그녀와 나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왜곡되고 사실처럼 변모한다. 그리고 나는 이전에 떠올린 기억과 대조하며 혼란에 빠진다. 시간과 함께 믿을 만한 기억은 사라진다. 하지만 감각은 마치 어제 경험한 것처럼 또렷하다. 빗소리, 떨어지는 물방울, 차가운 촉감, 마주 잡았던 손, 흩날리는 머리카락, 샴푸 향, 하얀 피부, 따뜻하게 나를 감쌌던 입술과 혀의 촉감이 나의 온몸 곳곳에 여전하다. 나는 그 감각을 그녀라 믿는다. 아니, 그 감각이 그녀라는 것은 자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