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의 시간 / 인격 005
제자들은 ‘누가 크냐’는 문제로 서로 논쟁하고 있있다(막 9장).
앞서 주님은 두 차례에 걸쳐 자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예고하셨다. 특히 그분의 죽음에는 극도의 겸손과 섬김의 메시지가 함의되어 있었지만, 제자들은 그 메시지 내용과 반대로 서로 자기가 크고 첫째 되는 사람이라고 핏대만 올리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그들은 왜 그런 어처구니없는 모습을 연출하였을까? 주님의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다(32절). 그런 무지가 잘못된 욕망으로 표출되었기 때문이다.
파스칼은 그의 저서 「팡세」(Pensee)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간은 자연 가운데 가장 약한 하나의 갈대에 불과하다. 하지만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이 말 속에는 인간이 한 줄기 갈대처럼 한없이 연약한 존재이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이 우주까지 포옹할 수도 있는 위대성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이렇게 창조하셨지만, 우리 인간은 그 생각을 잘못된 방향으로만 활용하려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서 절대 기준에 따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고, 자기 보고 싶은 대로만 보려고 하는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시각을 고집한다.
그런 모습이 가장 잘 나타난 사례가 창세기에 소개되어 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셨다(2:17). 하지만 사탄인 뱀은 그것을 먹어도 결코 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고 여자를 속였다(3:4-5).
그러자 뱀의 말을 듣은 여자의 시각이 이렇게 바뀌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3:6). 똑같은 나무의 열매인데 그것을 바라보는 여자의 마음이 왜 이렇게 바뀐 것일까? 절대 기준인 하나님의 말씀(경고)을 무시하고, 자신의 시각을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즉 사탄의 유혹에 빠져 욕망의 노예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서로 논쟁하였던 ‘누가 크냐’ 하는 문제는, 어찌 보면 ‘도토리 키 재기’처럼 사소한 문제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앞선 하와처럼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들어 있다. 그 욕망은 사탄에서 비롯되었고, 그 시작과 끝은 교만을 지향하고 있다. 그래서 그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기는커녕 대적하게 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음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분의 뚯(마 22:37-40)에 불순종하는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제자들의 논쟁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심각한 문제였다.
주님은 그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주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35절). 주님이 제시하신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겸손’과 ‘섬김’이다. 제자들의 생각과 정반대되는 처방전이었다. 따라서 서로 자신이 더 크다고 핏대를 올리는 세상에서, 그래서 심각한 문제에 노출되어 있는 이 땅에서, 그 역설의 처방전이 지금 가장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