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준택 Nov 03. 2020

중풍 병자의 친구들

산책의 시간 / 행복 004


  1. 자살하는 사람들


  작년 한 해, 우리나라에서 자살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놀랍게도 13,799명이다. 하루 평균 38명이 자살하였는데, 이는 날마다 대형버스 한 대씩 벼랑으로 떨어진 셈이다. 그런데도 뉴스에서 이 사건을 외면하는 이유는, 이제 그것이 우리의 일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욱 걱정되는 것은, 해마다 자살하는 사람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처럼 자살이 증가하는 이유는, 실패와 가난 같은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이들 곁에 진정한 친구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 곁에 마가복음 2장에 등장하는 중풍 병자와 함께하였던 사람들과 같은 친구가 있었다면, 자살이라고 하는 극단적인 선택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좋은 친구를 두었던 중풍 병자는 정말 복 있는 사람이었다.




  중풍 병자의 친구들은 네 명이었다. 그들은 중풍 병자를 메고 예수님을 찾아 왔지만, 북새통을 이룬 무리 때문에 그분께 나아갈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분이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 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렸다. 그들의 무모함은 동네 사람들로부터 지탄받아 마땅한 행동이었고, 심할 경우 동네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이 이토록 무모하게 행동하였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였을까? 아니다. 바로 친구인 중풍 병자를 그 병에서 낫게 해 주기 위해서였다.




  중풍 병자를 위한 네 사람의 행동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사랑’이라 할 수 있다. 그들에게 있었던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4절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는 언급을 통해 볼 때, 예수님이 중풍 병자의 병을 낫게 하실 수 있다는 믿음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의 무모한 행동이 객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분을 향한 믿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 얼마나 멋지고 훌륭한 친구들인가.



  2. 친구 만들기


  사람들은 중풍 병자의 친구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할지 모르겠다. “나도 저런 친구들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만약 우리에게 이런 친구가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친구를 만들면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은 친구를 만들 수 있을까? 방법은 간단하다. 내가 먼저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이다. 영어에 ‘give and take’라는 말이 있다. ‘받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주는 것’이 먼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사랑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그 사랑은 메아리가 되어 나에게 돌아온다.




  ‘황금률’(golden rule)이라는 말이 있다. 기독교 윤리의 근본 원리를 황금률이라 하는데, 예수님의 산상수훈 가운데 담긴 말씀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이 말씀에서 눈여겨볼 어구는 ‘무엇이든지’이다.


  또 누가복음에서도 이 말씀을 소개하고 있는데, 특별히 누가는 ‘남’이라는 대상에 ‘원수’까지 포함하고 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눅 6:27-31). 황금률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수준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우리도 남을 대접하되’, ‘원수에게까지’ ‘무엇이든지’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마냥 퍼주기만 하면 나만 손해 보는 것 아니야?’, ‘give and take라고 하였는데, 도대체 나에게 무엇이 돌아오지?’ 하지만 걱정할 필요가 하나도 없다. 성경은 ‘give and take’에 대해 이렇게 약속하고 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3. 이미 함께하는 친구


  좋은 친구를 만들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은, 이미 우리 곁에 있는 좋은 친구를 발견하고 그와 사귀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친구가 바로 예수님이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친구로 소개하셨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요 15:15).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제자들에게) 말하노니...”(눅 12:4).




  그분은 제자들에게만 친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세리와 죄인들에게도 자신을 친구로 소개하셨다. “인자는...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마 11:19;눅 7:34). 그뿐만이 아니다. 심지어 그분을 팔러온 가룟 유다에게도 여전히 친구로 부르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마 26:50).




  이렇게 제자들과 세리와 죄인들, 그리고 가룟 유다에게까지 자신을 친구라고 부르신 그분은, 말로만 친구처럼 행세하지 않으셨다. 친구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심으로써 친구를 향한 사랑을 몸소 증명하셨다. 그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십자가에서의 죽음이다. 그분은 그 죽음을 통해 친구인 우리를 향한 사랑을 온전히 이루셨다.




   그분은 최후의 만찬을 나누는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2-13). 서로 사랑하되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사랑하라 하셨다. 그렇다면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랑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최고의 사랑인데, 그분은 친구인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그 사랑을 이미 실천하셨다. 그러므로 그분보다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그분이 우리에게 친구 맺자고 제안하신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와 한낱 먼지나 벌레 같은 우리가 친구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하지만 그분은 그 제안을 부끄러워하시지 않았다. 인류 역사상 이것보다 더 위대한 발견, 더 위대한 관계가 또 있을까? 그런 분이 만약 우리의 친구라면 그 무엇이 두려울까? 그런 분이 만약 우리의 친구라면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일까? 두려울 것 하나 없고 부족할 것 하나 없다. 앞서 언급한 사람들처럼 자살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4. 지금 곧바로 친구 맺기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와 친구 맺기 원하신 그분은, 지금도 우리에게 생명과 풍성한 삶을 주기 원하신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이런 분을 친구로 거절한다면, 도대체 이 세상 그 어떤 존재를 친구로 삼을 수 있을까?




  그분과 친구 맺는 방법은 쉽고 간단하다. 그분을 우리의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분을 주님으로 믿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그분의 약속대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지고(요 1:12), 그에 따라 자동으로 우리는 그분의 친구가 되고, 그분도 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신다.




작가의 이전글 베드로의 항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