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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택 Nov 08. 2020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산책의 시간 / 인격 007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3일째 되던 날(수요일) 세 가지 논쟁을 벌이셨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보낸 사람들과 벌였던 ‘세금 논쟁’이다(막 12:13-17).


  누가복음에는 그들이 ‘정탐꾼’, 즉 ‘첩자들’이었다고 소개하고 있다(눅 20:20). 종교 지도자들이 첩자를 보낸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누가는 같은 구절에서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아서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 넘기기 위해서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그들이 던진 질문에는 세금 문제에 대한 양자택일의 요구가 들어 있는데, 그 가운데 어떤 것을 선택해도 덫에 걸리게 되어 있었다. 만약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다고 대답하면, 매국노라는 낙인이 찍혀 백성들로부터 배척당하게 될 것이다. 반대로 옳지 않다고 대답하면, 로마 당국으로부터 반역죄로 몰려 처형당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그런 의도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계셨다. 그들의 외식(위선, 거짓), 즉 선한 말 뒤에 숨어 있는 무서운 음모를 꿰뚫어 보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그리고 그들이 데나리온을 가져오자 이렇게 물으셨다.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그들은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들이 가져온 ‘데나리온’은, 은으로 만든 동전이다. 동전 한 개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오늘날로 치면 십만 원 정도에 해당하는 고액권이다. 거기에는 로마 황제의 형상과 함께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신성한(신인) 아우구스투스의 아들, 아우구스투스’(Tiberius Caesar, son of the Divine Augustus, Augustus)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그 동전에 새겨진 형상과 글귀는 로마 황제의 권위를 신격화한 것으로, 유대인들은 이를 신성모독과 우상 숭배로 여겼다.


  예수님이 그 동전에 누구의 형상과 글이 있느냐고 물으신 이유는, 그것이 바로 가이사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는 것이 당연하였다. 예수님은 이것을 통해 로마 정부를 인정하심과 동시에 세금을 내는 것도 마땅하다고 보셨다. 이런 인정에는 모든 국가나 민족의 흥망성쇠에 대한 역사의 주재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과 함께 세상 권위에 대한 복종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창 17:6;렘 18:7;대상 29:12;딛 3:1). 바로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분명히 밝히셨지만(눅 16:13), 그렇다고 로마 제국을 폭력으로 뒤엎어야 한다는 입장도 지지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예수님이 강조하신 것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것’은 가이사의 것보다 훨씬 더 포괄적이고 궁극적인 것을 포함하고 있다. 좁게는 십일조나 성전세 등을 의미하지만, 넓게는 인생의 모든 주권에 관한 것까지 포함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이미 그들의 간계를 알고 계셨다. 이 부분에서 마가는 그들의 외식함을, 마태는 그들의 악함을 예수님이 아셨고,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고 책망하셨다고 밝히고 있다(마 22:18).


  그렇다면 외식은 왜 악할까? 그것이 거짓이기 때문이다. 또 그 초점이 하나님께 있지 않고 자기 자신을 높이는 데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높이다 보면 주님의 뜻인 ‘겸손’과 배치되고, 따라서 순종이 아닌 불순종으로 하나님을 대적할 수밖에 없으므로 악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에는 그렇게 하지 않는 상황이 전제되어 있고, 그들이 여전히 하나님께 바치고 있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것, 곧 그분의 주권에 대한 부정이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바리새인과 헤롯당에서 보낸 사람들처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처럼 우리 자신을 위선으로 포장한 채 그분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 ‘나는 예수님을 공격한 적이 없다’고 항변할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매일 그분을 공격한다.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우리의 모든 생각과 삶이 그 증거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정직과 겸손의 도를 삶에 실천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우리의 모습은 위선으로 가득 차 있고, 그 위선을 통해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려고만 한다. 다시 말해서 자기 영광을 추구하기 위해, 바리새인들처럼 위선과 교만으로 자신을 포장한다.


  ‘위선’은 거짓이고, 거짓된 삶의 뿌리는 ‘교만’이다. 하나님은 위선자를 가증스럽게 보시고,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미워하시고(잠 16:5),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시는 분이시다(잠 15:25). 그래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 된다(잠 16:18). 우리는 그 선봉에 서는 우매한 자의 길에 들어서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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