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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택 Nov 10. 2020

잘못된 판결

산책의 시간 / 인격 008


  본디오 빌라도(Pontior Pilatos)는 로마 정부에서 파견한 총독이었다. 마가복음 15장에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고 판결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 사건은 수난 주간의 마지막 날인 금요일 새벽에 일어났는데, 공회가 예수님을 죽일 죄인이라고 고소함으로써 발단이 되었다.




  마가는 총독 빌라도가 그분께 죄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넘겨주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동일 내용을 소개하고 있는 누가복음에 보면, 빌라도는 공회의 고발 내용과 달리 그분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에게 세 차례에 걸쳐 그분이 죄가 없다면서 무죄 석방하려고 노력하였다(눅 23:4,14-16,22). 심지어 두 번째로 죄가 없다고 말할 때는, 갈릴리 지역을 관할한 헤롯 왕조차 죄를 찾지 못하고 그분을 다시 우리에게 보냈다고 하면서 오히려 그분의 무죄를 변호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결국 그는 자신의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그분을 십자가에 내줘 버렸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렇게 자신의 소임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잘못된 판결을 내렸던 것일까?


  그 이유는 최소 두 가지 이상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첫째, 사람들로부터 자칫 잘못하면 로마 황제의 충신이 아니라는 말을 들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빌라도는 그분을 석방하려고 힘썼지만, 무리는 오히려 그에게 이렇게 소리 질렀다. “(당신이)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닙니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입니다.”(요 19:12) 가이사에게 반역하는 자를 도와주면 어떻게 될까? 반역을 공모하는 자가 되어 버린다. 빌라도는 무리의 이러한 협박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번째 이유는, 무리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서였다. 총독의 관저는 본래 예루살렘이 아닌 가이사랴 마리티마(Caesarea Maritima)에 있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큰 절기에는, 특히 애굽에서의 해방을 기념하는 유월절 같은 절기에는 예루살렘으로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소요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그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판결 문제로 자칫 군중이 자신들의 뜻과 다르다고 소요를 일으키기라도 한다면, 그 사건을 통제하지 못하였다는 보고가 로마 황제에게 전달될 것이 빤하였다. 빌라도는 바로 그와 같은 상황이 부담되어 무리의 요구(협박)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공정하게 재판해야 할 자신의 소임을 저버린 채, 살인자는 놓아주고 무고한 그분을 십자가형에 넘겨주는 어처구니없는 잘못을 범해 버렸다.




  잠언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빌라도는 정작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두려워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넘겨주는 죄를 범하는 올무에 빠져 버렸다. 그 결과 자신의 영혼까지 팔아먹고 지금까지도 뭇사람의 비판을 받고 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을 의지하는 사람은 빌라도와 같은 처지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이런 사람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고 또 주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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