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의 시간 / 예수 그리스도 008
고린도전서 13장이 ‘사랑’의 장이라면,
15장은 ‘부활’의 장이다.
사도 바울은 15장 3-9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담긴 특징 두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첫 번째 특징은, 그분의 부활이 ‘성경대로’ 이루어진 사건이었다는 점이다. 바울은 그 예로 시편 16편 10절 말씀을 다윗이 아닌 주님의 부활에 관한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행 13:34-37).
그렇다면 이렇게 주님이 성경대로, 즉 성경에서 예언한 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 사건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에 따라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사건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특징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증인이 많이 있었다는 점이다. 바울의 진술에 따르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게바(베드로)에게 보이신 후에 열두 제자에게 보이셨다. 그리고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도 일시에 보이셨다.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신 사건은, 아마도 갈릴리에서의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에서 ‘일시에’ 보이셨다는 것은, 오백여 명의 형제들이 한자리에 함께 있을 때 보이셨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분의 부활은 그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의 광범위한 개방성으로 인하여, 소설 쓰듯이 꾸며낼 수 없는 사건이었다. 더구나 바울이 그 편지를 쓴 시점에도 그 가운데 태반이나 살아 있었기 때문에, 그 사건은 조작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호의적이었다면, 야고보와 바울은 부정적이거나 적대적인 사람들이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이었지만 그분을 메시아(그리스도)로 믿지 않았다(요 7:2-4).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후에야 개종한 것으로 보이는데, 후에 베드로에 이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던 사람이다. 그런가 하면 바울은 주님의 몸인 교회를 핍박하였던 사람이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하나님의 은혜로 사도가 되었다.
이들 모두 개종하기 전에 그분과 그분의 부활을 부정하거나 믿지 않았다. 오히려 심하게 박해하였다. 따라서 이들의 변화와 증언은, 역으로 예수님의 부활에 더욱더 역사적 객관성을 부여해 주고 있다.
초대 교회 당시 유대교나 헬라 문화권에서는 영혼 불멸을 믿었지만, 육신의 부활만큼은 믿지 않았다. 그런 불신은 현대에 와서도 좀처럼 그 힘을 잃지 않고 있다. 심지어 과학 기술의 발달은 이성으로 규정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하여 모두 부정하게 만듦으로써 수많은 사람에게 영혼의 존재까지 부정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러니 현대인들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믿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또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사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 사건의 생생한 증인들이다. 그 사건을 목격한 사람은 이들뿐만이 아니다. 수많은 여인도 그분이 부활하신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하였다(눅 23:55-24:10).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눈앞에서 객관적으로 벌어진 현상까지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런 행위는 현대 과학 기술이 낳은 교만에 불과하다. 과학 기술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그것이 규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사실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한낱 먼지보다 작은 코로나바이러스에 허둥대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그런 인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