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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택 Nov 22. 2020

죄로 얼룩진 예루살렘 성읍

산책의 시간 / 인격 010

     

  스바냐는 남 왕국 유다의 요시야 왕(기원전 640-609년) 때 활동하였던 선지자이다. 하나님은 그 당시 예루살렘 성을 이렇게 진단하셨다.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습 3:1). 국어사전은 ‘패역하다’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하여야 할 도리에 어긋나고 순리를 거슬러 불순함.” 이처럼 예루살렘 성읍은 마땅히 지켜야 할 그분의 도리에서 벗어나 반역으로 맞서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죄악으로 더러워졌고, 폭정으로 억압을 일삼는 도성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루살렘이 그 지경이 되도록 앞장선 사람이 지도자들이었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백성을 섬겨야 할 ‘방백들’은, 오히려 굶주려 부르짖는 사자처럼 그들을 착취하였다. 또한, 공정한 재판으로 억울한 사람들의 신원을 풀어줘야 할 ‘재판장들’은, 오히려 그들을 먹잇감 삼아 늑대처럼 밤새도록 몰려다니며 가난한 백성들의 재산을 남김없이 물어뜯었다.




  ‘선지자들’마저 이들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 그분의 뜻과 섭리를 대신 전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들은 경솔하고 간사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거만을 떨었고, 자기 잘난 맛에 사람들을 속이기를 일상으로 여겼다. ‘제사장들’도 그 대열에 합류하여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다. 성소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이다. 그 어떤 곳보다 거룩하여야 할 성소가 제사장들에 의하여 더럽혀졌다. 율법을 사수하고 생활 속에서 철저하게 율법을 지켜야 할 그들이, 도리어 앞장서서 율법을 어기기만 하였다.




  예루살렘 성읍의 이런 모습에 진노하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심판을 예고하시면서, 그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들의 귀에는 그분의 말씀이 들리지 않았고, 도리어 ‘부지런히’ 그들의 모든 행위를 더럽히기만 하였다. 새번역성경은 그들의 모습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못된 일만 골라 가면서 하였다”(7절).




  그렇다면 그들은 왜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을까? 첫 번째는, 죄에 관성이 붙어버렸기 때문이다. 죄를 범하는 데 앞장섰던 지도자들의 행태와 죄의 집단화가 관성, 즉 등속도 운동을 촉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두 번째 원인은, 그분의 심판에 대해 ‘설마’ 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특히 ‘남들도 죄를 범하는데 별일이야 있겠어?’ 하는 마음이 죄를 범하는 데 ‘부지런함’을 제공하였다.




  그런데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등속도 운동을 하던 관성은 무참히 파괴되어 버렸다. 그 모든 일은 역사를 주관하신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분이 예고하신 심판 내용 그대로 예루살렘 성읍은 바벨론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고, 백성들은 포로가 되어 비참하게 끌려갔다(기원전 586년).




  예루살렘 성읍의 이러한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너무도 간단하고 명료하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오십보백보의 처지에 있는 우리는, ‘설마’ 하는 그릇된 망상을 접고 이미 관성이 되어버린 죄에서 돌이켜 회개해야 한다. 그들의 죄에 대하여 심판을 예고하신 하나님은, 이제 그 방향을 돌려 우리에게 그것을 예고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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