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의 시간 / 인격 014
‘가버나움’은 ‘나훔의 마을’,
즉 ‘위로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마태복음 4장에는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신 시점과 장소가 나온다. 시점은 침례 요한이 잡혔을 때이고, 장소는 가버나움이다(11-12절). 예수님이 공생애의 대부분을 사셨던 ‘가버나움’은, 갈릴리 북서쪽 5km 지점에 있는 성읍이다. 그 당시에 로마 군대가 주둔하고 세관도 있는 큰 성읍이었던 이곳은(마 8:5-9;막 2:14), 어업이 번창하였고 동방과 지중해를 연결하는 동서 상업로의 요충지였다. 그래서 이곳을 통과할 때에는 통행세를 지불해야만 하였다. 하지만 갈릴리 지역에는 많은 이방인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이방인의 땅으로 인식되어 정치, 종교적으로 소외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공생애의 대부분을 수많은 마을 가운데 다른 곳도 아닌 가버나움에서 사셨던 것일까? 이스라엘에는 정치, 경제, 종교적으로 가버나움보다 훨씬 중요한 성읍이 많이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이나 예수님이 태어나신 베들레헴, 그리고 헤브론, 벧엘, 브엘세바 등과 같은 곳들이 아닌, 하필이면 이방인의 성읍인 가버나움에서 사셨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였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14-16절).
하나님의 뜻은, 이방(소외)과 흑암과 사망과 그늘에 앉은 그들에게 그 무엇보다 필요한 빛을 선물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참 빛’이신 아들 그리스도 예수(요 1:9)가 그곳에 머물기 원하셨다. 예수님은 그분의 뜻에 따라 또 그분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곳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셨고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셨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이 자신의 원대로 거처를 정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심으로써 그분의 약속을 성취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살아갈 때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또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곳에는 그분의 영광과 평화도 함께 임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고 이 땅은 평화를 선물로 받게 된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평가하였다(삼상 15:22-23).
포스트모더니즘이 현대인들에게 남긴 유산 가운데 코어(core)는 ‘세상의 중심에 자기 자신을 세우기’인 것 같다. 그 결과 모든 가치는 상대적인 것이 되어 버렸고, 그 가치가 녹아 있는 삶의 현장은 ‘자기 멋대로’가 판을 치고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 최고의 선(善)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가장 큰 장애물인 하나님을 자신들의 삶에서 소멸시킨다.
그렇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시대 상황이 있다. 사사 시대에 만연하였던 현상이 그것이다. 당시에는 왕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삿 21:25). 그렇게 행한 결과 이스라엘 땅에는 역사상 가장 추악한 죄악들이 범람하였다. 그때와 지금의 상황은 어느 모로 보나 닮아 있다. 이런 상황을 돌이킬 수 있는 길은 가버나움에서 사셨던 예수님을 기억하고 그분처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