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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택 Dec 06. 2020

같은 표적과 다른 표적

산책의 시간 / 믿음 013


  누가복음 1장에는 침례 요한의 출생을 예고하는 내용이 소개되고 있다.


  그의 아버지 사가랴는 제사장이자 의인이었다. 천사 가브리엘은 그에게 나타나 요한의 출생과 함께 그가 주 앞에 먼저 와서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할 것이라고 예고하였다. 사가랴는 비록 아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천사의 말에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천사가 전한 말 속에는 너무나 엄청난 내용이 담겨 있었고, 더구나 그와 그의 아내는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그 일이 자신들에게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천사에게 물었다.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18절). 그의 질문에는 두 가지의 함의가 들어 있다. 첫째, 이미 늙어버린 우리 부부의 몸을 고려할 때 그것을 믿기 어렵다. 둘째, 그러니까 그것을 믿을 만한 증거, 즉 표적을 보여달라.




  사가랴의 질문에 천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20절). 천사는 그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말을 하지 못하지만, 그것을 통하여 자신이 전한 말을 확증하는 ‘표적’으로 삼기도 하였다. 즉 병 주고 약 준 셈이다.


  표적을 구하는 사가랴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의문이 들지 모르겠다. “그의 행위가 주님께 표적을 구하였던 바리새인들의 모습과 무엇이 다른가?” 바리새인들이 두 차례에 걸쳐 주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였을 때, 주님은 그들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평가하시면서,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다고 대답하셨다(마 12:38-39;16:1-4). 따라서 표적을 구한 사가랴의 모습은 그들과 똑같이 악하고 음란하게 비칠 수 있다. 과연 그럴까?




  사가랴와 바리새인들의 모습은 결과적으로 같아 보이지만, 그 동기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다. 그래서 같은 표적이지만 다른 표적이었다. 사가랴는 비록 믿음이 없었지만, 천사의 놀라운 말을 듣고 그에 관한 믿음을 갖기 위하여 확실한 증거인 표적을 구하였다는 점에서 자연스럽다. 구약성경에는 이런 사람들이 여러 명 소개되고 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창 15:3-8), 사사 기드온(삿 6:7), 남 유다의 히스기야 왕(왕하 20:8) 등도 하나님의 말씀이 믿기 어려워 그 믿음을 담보할 수 있는 표적을 사가랴처럼 구하였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을 향해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평가하지 않으셨다. 그들의 요청대로 놀라운 표적을 보여주심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도우셨다.




  그렇지만 바리새인들은 달랐다. 예수님께 표적을 구할 때 거기에는 그 표적을 보고 믿으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 애초에 그들은 주님을 믿지 않았고 또 믿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은 단지 그분을 시험하기 위하여(마 16:1), 즉 그분을 공격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였을 뿐이다. 그들의 관심은 온통 자신들의 기득권에 방해가 되는 주님을 제거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악하고 음란하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귀신 들린 아들을 데려와서 주님께 이렇게 간청하였다.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그의 간청에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그러자 그가 소리를 지르면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막 9:24).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자신이 예수님을 믿지만 동시에 믿음이 없는 것, 즉 그분을 향한 믿음이 약하거나 작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숨기거나 과장하지 않았다. 다만 약한 믿음을 강한 믿음으로 바꿀 수 있도록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였다.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와 사가랴의 모습은 바로 그런 점에서 서로 닮은꼴이다. 믿고 싶은데 잘 믿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서 전자는 천사에게, 후자는 예수님께 믿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손을 내민 것이었다.


  신앙, 즉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믿음이 없을 때는 사가랴나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처럼 그것을 숨기거나 과장하지 않고 정직하고 겸손하게 도와달라고 간청하는 것이 바로 주님을 향한 올바른 신앙이다. 그로 인해 주님께 꾸중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처럼 주님의 도우심을 경험하고, 사가랴처럼 주님이 약속하신 때까지 주님이 주신 표적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주님은 오늘도 믿음 없는 우리에게 그와 같은 축복을 선물로 주시려고 학수고대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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