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의 시간 / 소망 001
하나님은 두 가지 방법을 병행하여 우리 인생을 통치신다.
'형통'과 '곤고'가 바로 그것이다(전 7:14).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신다(전 3:11a). 그래서 우리 인생에 주어지는 두 가지, 즉 형통과 곤고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형통할 때뿐만 아니라 곤고할 때에도 '항상' 하나님께 찬송(감사)의 제사를 드릴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감사하지만, 곤고한 날, 즉 형편과 처지가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에는 슬퍼하고 원망한다. 우리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그 곤고함을 하나님처럼 아름답게 보는 것이 아니라 나쁜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곤고할 때에도 '아름다운' 시각을 가지고 살았던 대표적인 사람이 요셉이다. 요셉은 아무 잘못도 없이 형들의 인신매매로 애굽의 노예가 되었지만, 원인 제공자인 형들이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는 애굽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충성되게 일만 하였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돌아온 것은 오해에서 비롯된 감옥 생활뿐이었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불평이나 원망을 하지 않았다. 간수장이 맡긴 옥중 죄수들을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간수장이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않을 정도로, 성실하게 감옥 일을 돌보았다.
그렇다면 요셉은 이런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 그러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그 이유가 창세기 45장 5-8절에 나와 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형들보다 먼저 애굽으로 내려올 때, 그 상황은 분명 요셉에게 재앙이었다. 그로 인해 그는 노예가 되었고, 감옥에 갇히는 비참한 죄수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 순간을 하나님의 축복이 시작되는 시점으로 바라보았다. 그때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속에서도 꿈을 주시고 그 꿈을 이루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결코 잃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토록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단 한 마디의 원망이나 불평도 토로하지 않았던 것이다.
함께하시고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요셉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피조물에 적용되는 원리이다. 우리가 볼 때 요셉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지 못하였던 순간들은, 하나님이 보실 때 그와 그의 가족의 구원이 시작되는,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만약 지금 이 순간 가장 어렵고 고통스러운 처지에 놓여 있다고 느껴진다면, 요셉처럼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 시간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 일어나는 시점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송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 만약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고, 또 그분의 선하심을 믿는다면, 그 시간을 항상 찬송으로 화답할 수 있다.
찬송은 단순하게 아름다운 곡조로 끝을 맺지 않는다. 찬송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찬송에는 능력이 있다. 요셉의 찬송은 그의 인생을 노예와 죄수의 신분에서 총리로 바꾸어 주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그들은 그로 인해 불평과 원망 대신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그 결과 그들의 찬송은 감옥에 함께 있던 죄수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감옥 문을 열었고, 또 간수가 구원받는 놀라운 사건으로 이어졌다. 찬송에 이런 능력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찬송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