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의 시간 / 믿음 006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 그리고 그 일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주님이 나의 상황을 알고 계실까?’, ‘주님이 나를 돕기 위해 오실까?’ 마가복음 6장 45-52절에는 그것에 대한 해답이 제시되어 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재촉으로 황급히 배를 타고 갈릴리 건너편 벳새다로 가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아무리 힘겹게 노를 저어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밤 사경에 이르러서도 배는 여전히 바다 한가운데 떠 있었다.
갈릴리 호수는 폭이 10km 정도 된다. 따라서 배가 한가운데 있었다는 것은 5km 정도밖에 나아가지 못하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정황상 제자들은 해가 저문 일경(저녁 6-9시)에 출발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때부터 사경(새벽 3-6시)까지 9시간 정도 힘겹게 노질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가운데 베드로와 같이 노련한 어부 출신도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그들조차 어찌해볼 수 없는 크나큰 자연 장애 앞에 놓여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홀로 기도하시던 산에서 그런 그들을 보고 계셨다. 여기에서 ‘보다’라는 단어는 ‘주목하다’라는 뜻이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바라본 것이 아니라, 그들이 처한 상황을 계속 예의 주시하고 계셨다. 그리고 최선의 때에 바다 위를 걸어오셔서 제자들의 항해를 괴롭히던 바람을 잠재우셨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으신 주님은, 여전히 우리의 상황을 주시하고 계시고, 최선의 때에 놀라운 능력으로 좋은 것을 선물해 주실 것이다.
문제는 우리에게 있다. 우리는 우리를 보고 계시는 주님, 그래서 돕기 위해 오실 주님을 믿고 기대하는 마음이 ‘둔해져’ 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바다 위를 걸어서 자신들에게 오신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 소리 지르면서 호들갑을 떨었고, 바람이 잠잠해지자 새삼스럽게 심히 놀라기도 하였다. 이러한 두 가지 반응을 통하여, 우리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도움을 기대하지 않았고, 예수님께 그런 능력이 있다고 믿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병이어 사건을 경험한 지 반나절도 안 되었는데도 그랬다.
한 번쯤 의문을 품어보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 의문은 피상적인 믿음을 구체적인 것으로 바꾸는 기회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지나쳐 의심으로 변질되어 버리면 곤란하다. 주님이 우리를 주목하신다는 것과 우리를 돕기 위해 바다 위를 걸어오신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이런 내용이 사실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특별 계시인 성경이 그것을 보증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이 우리의 마음속에 구체적인 믿음으로 뿌리 내리고, 그 뿌리에 기대어 주님을 기대하는 마음이 꽃으로 활짝 피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