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여진 Feb 06. 2019

영화 '쓰리 빌보드'


윌러비 서장은 유색인종 차별주의자이자 동료 경찰관인 딕슨에게 사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 이상의 것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문장의 임팩트는 매우 크다. 그것은 유성을 뛰어넘어서 인류에 대한, 어쩌면 모든 본질적인 것들에 대한 연대와 유대를 뜻할지도 모르겠다.


싫어함과 좋아함은 어쩔 수 없이 공존한다. 둘 다 존재한다. 우리는 이렇게 존재하는 모순 중 한쪽만을 지향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지만, 결과론적으로 우리는 딕슨 같은, 윌러비 같은, 밀드레드 같은 다양한 성향의 개개인과 살아가야 한다.


이 개개인들과 호불호가 시간의 흐름을 같이 하기 위해서는 연대와 유대만이 답이라고 생각한다. 특정한 것에 대한 성찰, 개인적인 성향(호불호 포함)을 통해 도출된 이념들은 당연한 것이다. 개인을 중요시한다는 시대에서 개개인이 가지는 이념들의 존재조차 부정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이 '사회에 어떻게 발현되느냐'에 대한 문제이다. 마틴 맥도나 감독은 그 문제를 '밀드레드-윌러비-딕슨'의 삼각관계(통상적인 로맨스 X)를 통해 예술적으로, 효율적으로(반대되는 표현일 수 있지만 이 영화에선 가능했다.) 드러낸다.


핵심 키워드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사랑'이다. 바꿔 말하자면 인류애, 연대. 나 때문에 피해가 생긴 개인에게 미안함을 표현할 줄 아는 연대. 그를 통해 개개인과 호, 불호(단편적으로 말하자면)는 이미 공존하고 있음을 인정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이 공존이 드러나는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밀드레드와 딕슨이 그 범죄자를 죽이지 않았을 거라는 데에 한 표를 던진다. 밀드레드의 쓰리 빌보드는 어쩌면 그 장면에서 최종 목표를 달성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전글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