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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여진 Mar 03. 2019

아이는 죄가 없다 :
사랑과 '눈에 밟힌다'는 감정

영화 '가버나움'


1. 존중과 공경 = 사랑

나는 어릴 적 엄마에게 불안정한 감정들을 많이 느꼈다. 또한 가족과 관련된 사건들에 대해서는 감정의 극한을 자주 느꼈다. 이 문제를 궁극적으로 엄마와(가족과) 해결하진 못했지만, 적어도 내가 그들에게서 자유로워질 수 있음을 느낀 건 성인이 되고 나서였다.


그러고 나서 사흘 전, 아빠와 새벽에 대화를 할 기회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우리 가족' 구성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그러다가 거시적인 '가족'에 대한 아빠의 생각을 들을 수 있었다. 나와 아빠, 둘 다 가족은 최소의 사회 단위이며, 그 안에는 규칙이 존재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빠는 여기서 규칙에 단순히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부모는 아이에게 존중을, 아이는 부모에게 공경을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존중공경은 충돌을 풀어나가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즉, 규칙에서 벗어나는 몇몇 파편들은 가족 내 존중공경을 통해 이해되며, 사랑받는다.


실제 사회생활(학교, 회사 등등)에서는 규칙을 지키지 않았을 때 오는 제재와 처벌이 확실하다. 하지만 특별하게도, '가족'은 규칙에 엄격하지 않다. 가족은 규칙에서 벗어날 때도 결론적으로는 서로를 감싸 안게 된다. 또한 제재와 처벌에는 확실히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존재한다(존중공경). 이것이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기본적으로 배우게 되는(혹은 배워야 하는) 무조건적인 사랑이해이다.


나는 가족의 의미를 탐색하는 아빠를 두었다. 그는 충돌이 생겼을 때 규칙에서 어긋남만을 따지는 소모적인 싸움이 있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내가 규칙에 대한 제제와 처벌에 집중하고 있을 때, 그를 해결하는 방법이 사랑과 이해라는 것을 설명해주었다. 나는 그를 인지하고 이해하면서도 상당히 놀랐다. 머리를 맞은 듯하였다. 그리고 그때 느꼈다. 아빠는 나를 생각보다 많이 사랑하고 있으며, 나 또한 아빠를 사랑한다. 나는 앞으로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진심 어리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가족의 의미였다.


2. '눈에 밟힌다'는 감정

영화 '가버나움' 속 자인은 기본적으로 배우게 되는 가족의 사랑과는 거리가 먼 아이다. 그의 부모와 그는 규칙 성립부터 삐그덕거렸다. 규칙은 가족 구성원 모두의 합의 아래에서 정해져야 한다. 아이는 부모와는 또 다른 가치관과 취향을 가진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자인은 그러한 인격체로서 존중받지 못했다. 따라서 자인은 부모, 혹은 가족을 공경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인이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절대 없다. 선후 관계가 분명한 문제다. 자인은 인격체로서 존중받지 못했다. 그가 배울 수 있는 사랑과 이해가 선행되지 않았다. 자인이 굳이 비난받아야 한다면 단지 태어났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조차도 자인의 의도대로 행해진 것이 아니다.


자인뿐만이 아니다. 모든 아이에게는 죄가 없다. 그들은 단지 태어났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태어났다는 이유로 사랑받아야 한다. 그렇게 아이는 사랑을 배우고 어른이 된다. 이것은 끊임없는 순환 구조다. 이 연결 고리는 전혀 틀린 것이 없다. 완벽한 이론이다. 인격체가 태어나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하나의 우주가 생겨남을 뜻하는데, 이것은 아주 막중한 일이다. 이에 대한 책임은 당연히 부모가 져야 한다. 그들이 태어남을 선택하는 주체이기 때문에. 책임이라 함은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랑을 가르쳐 주는 일이다. 사랑은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 존재의 이유가 된다. 스스로의 존재가 낮아지지 않는 존엄성의 이유. 그리고 불행하고 우울해지지 않는 여유의 이유. 이것들이 존재를 이루어 아이가, 인간이 다채로워진다.


영화 '가버나움'은 어설픈 신파극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이며, 지옥이다. 자인은 나와 달리 영화 끝까지 가족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 사랑을 가족에게서 배우지 못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자인은 다채로웠다. 아이들은 따뜻했고, 영화는 아름다웠다. 자인은 '눈에 밟힌다'라는 감정을 받아들이고 표현할 줄 아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3월 1일, '가버나움' 라이브러리 톡(영화 GV)이 있었다. 진행을 맡은 김세윤 작가는 '가버나움'을 '눈에 밟힌다'라는 감성의 영화라고 소개했다. '눈에 밟히다'는 '잊히지 않고 자꾸 눈에 떠오르다'라는 뜻을 가진 관용구이다. 영화 속 자인에게는 사하르, 요나스가 그런 존재였다. 그리고 라힐에게는 자인이 그러했다. 그들이 눈에 밟히는 존재들에게 선사한 것은 무조건적인 배려였다.



다채롭지 않은가. 자인은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사랑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이다. 그가 요나스를 돌보지 않았다고 해서 비난받을 건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사하르를 덜 소중히 여겨서 아사드를 칼로 찌르지 않았다면, 그는 절대 감옥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인은 요나스를 아스파르에게 남길 때 눈물을 흘렸다. 라힐과 요나스가 웃는 모습을 보고 사하르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자인이 그렇게 행동한 데에는 이유가 따로 없었다. 그는 '눈에 밟히는' 존재들에게 당연하다듯이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그 흔적에는 배려따뜻함이 가득했다. 다시 말하자면 자인은 '눈에 밟힌다'는 감성을 통해 사랑을 베풀게 된다.


3. 아이는 죄가 없다

영화 속에서 '눈에 밟힌다'는 감정은 사랑에 도달하기 위한 중요한 단계가 된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성취해내는 가족의 사랑보다 더욱이 순수하고 고결할 것이다. 자인이, 어린아이가, 스스로 이루어 낸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실행(표현)해내는 것에 막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이가 어린 인격체가 이를 이루어 낸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감정이 아무런 조건 없이 이루어진 것에 집중해야 한다. 그것은 오로지 아이만이 할 수 있는 숭고함이기 때문이다. 자인에게 현실적인 조건이란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에게는 '눈에 밟히는' 감정만이 중요했다. 그 대상들에게는 거침없이 표현했다.


자인은 정말 거침없었다. '눈에 밟힌다'는 그 감정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표출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것에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것은 영화 내러티브 상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상당히 임팩트 있는 포인트가 된다.


자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 모든 아이들이 그럴 것이다. 그들에게는 숭고함이 잠재되어 있다. 다채로움이 형성될 수 있는 그런 숭고함. 부모는, 나아가 사회는 이를 책임져야 할 필요성이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단순히 나이가 어린 약자들을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다. 멀리 보았을 때 부모를 위한 일이자 사회를 위한 일이다. 사랑은 사회의 원동력이다(순환 구조라고 하지 않았나). 사회는 다채로워야 한다.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당연'은 진부함을 동반한다. 일반적인 상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물 흐르듯 수없이 들어온 것일 테니까. 그렇지만 이 이야기가 진부하지 않은 곳은 생각보다 많다. 당장 영화의 배경이었던 레바논 베이루트 지역이 있다. 그리고 이에 견줄 것도 못되겠지만 나 또한 그를 어렴풋이나마 느낀 적이 있다.


내 이야기를 굳이 끄집어내는 것은 이 이야기를 진부하게 만드는 수많은 이유들 중에 하나가 되기 위함이다. 이 이야기는 진부해져야 한다. 나는 진부하지 않았던 시간들이 있었고, 그는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 까지 나를 괴롭혔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나는 나 나름대로의 사랑을 찾아냈고, 행복을 위해서 살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이들이 이러한 과정을 겪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무조건적으로 사랑받아야 한다. 그들이 사랑받지 못해서 성장하는 중에 악을 저지른다면, 안타깝게도 그것은 그들의 몫이 된다. 그들의 죄가 된다는 말이다.


나조차 감정의 극한에서 악을 행한 적이 있다(물론 '악'의 기준은 다 다를 것이다). 억울하게도 그것은 나의 죄가 된다. 그리고 그것이 점점 나의 일부가 된다. 아이들은 죄가 없다. 오히려 그들 스스로 아름다운 감정을 만들어낸다. 그들이 감정의 극한까지 경험할 필요는 전혀 없다. 아이들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나딘 라바키 감독은 아동학대, 아동노동 문제가 자연스러움에 분노를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분노를 무언가로 바꾸고 싶었다고 한다. 무언가. 무언가. 나딘 라바키 감독에게 그 '무언가'는 가버나움이었다. 성경에서는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도시, 프랑스 문학에서는 카오스와 지옥이라는 가버나움.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언가'는 어떤 것일까?



라바키 감독처럼 4년을 투자하며, 500시간을 카메라에 담아내자는 말은 물론 아니다. 다만 나는 기억하고 싶다. 아이들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을. 이것을 단순 사실의 나열이라고 보지 말아 주길. 감탄, 존중의 문장이자 눈에 밟히는 감정의 동요임을 알아주길.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우리처럼 죄가 많아지지 않기를 바라는 기도임을 알아주길.



+)

그리고 나는 유형의 '무언가' 또한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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