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기, 찍어내기, 자동화, 다시 만들기
만들기
영화 《사랑과 영혼》의 명장면이 있죠? 페트릭스웨이지와 데미무어가 도자기 빚는 포스터! 워낙에 그 장면이 유명하다 보니 도자기 빚는 물레에 앉으면 누구나가 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하거나 기념사진 한 장 남겨놓기를 원합니다. 마치 예전에 “미원”이라는 상표가 조미료의 대명사가 되었던 것처럼 전무후무한 명장면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건축과를 가지 않았더라면 조소과나 미대를 갔을 거라고 공공연히 말할 만큼 공예나 조소에 관심이 많았고 해 보고 싶은 일중의 하나였습니다. 조각하는 사람들도 대단해 보였고, 장인들의 공예품을 보면 말 그대로 “한 땀 한 땀” 정성 들인 그 노고(?)를 치하할 수밖에 없습니다.
찍어내기
주물로 무쇠가마솥을 만들거나, 실크스크린으로 도안을 인쇄하거나 금형으로 제품을 찍어내거나 하는 일도 매력이 있습니다. 하나만 정성스럽게 만들면 같은 제품을 어렵지 않게 복사해 내는 묘미가 있습니다. 어릴 적에 찰흙에 조그마한 인형을 눌러 움푹 파인 음각의 모양을 만들고 양초를 녹인 물로 똑같은 인형을 만들어낸 신공(?)에 뿌듯해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틀을 만들고 거기에 재료를 부어 만들면 이제부터 작품이라기보다는 공업생산물로 그 특성이 바뀌고 재료비, 가공비, 후처리비가 부가되면서 제품 단가가 형성됩니다. 뜻하지 않은 기회에 3차원 모델링으로 제품설계를 하고 MCT로 금형을 만들어 아연제품도 찍어내고, 알루미늄 다이캐스팅, 플라스틱 사출로 제품을 만든 적이 있습니다.
‘와! 신기하다. 나도 제조공장 하나 갖고 싶다’
자동화_시스템화
군대에서 차트병으로 손글씨를 잘 쓴 나였지만 손으로 글씨 쓰는 일은 정말 하기 싫은 일 중의 하나입니다. 명필이 아니어서 그런 걸까요? 느려도 너~무 느립니다. 내 생각을 쏟아붓기엔 수정하고, 다시 정리하는 일에 생각의 흐름이 끊어질 뿐 아니라 고무지우개나 첨삭 기호를 사용할라치면 원고도 너무 지저분한 과정을 겪기 때문입니다. “한글과 컴퓨터”에서 워드프로세서 “아래아한글”이 나오고 개인용 컴퓨터를 처음 접했을 때, 메뉴얼 없이도 어렵지 않게 다룰 수 있는 직관적인 프로그램에 절로 탄식이 나왔습니다. 수정 교정작업에 탁월할 뿐 아니라 입력한 주소록에 블록을 잡고 소트(Sort)를 시키니 “가나다”순으로 한꺼번에 정렬되는 “신기”를 접한 후 컴퓨터의 매력에 푹 빠졌습니다.
대학시절, 방학 때 「주택공사연구소」에서 단기 알바를 했는데 소속된 팀이 “MC 연구팀”이었습니다. 모듈러 코디네이션(Moduler Coordination)이라는 주택의 표준화 작업에 대한 연구로서 기술적으로 이미 앞선 일본의 MC기술을 교본 삼아 국내 기술로 개발하려는 것이었죠. 현재 공동주택설계 시 적용되는 안목치수설계를 주택공사연구소에서 미리 맛(?)을 본 나로서는 설계도면에 MC설계 기호만 봐도 남다른 감회(?)가 있습니다. 이것도 역시 생산성 향상을 위한 제품의 규격화, 표준화의 방법입니다.
예전에 어떤 강사분이 산업의 흐름을 주제로 강의하다가
“여러분! 제가 돈 버는 방법을 알려 드릴까요? 모든 산업은 자동화되고 시스템화되는 방향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지금 주변을 돌아보고 시스템이 될만한 곳을 찾아보세요. 거기가 바로 사업의 시작점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통찰력 있는 견해라고 여겨집니다. 화물, 운송, 유통, 인력도 지금은 플랫폼이나 어플로 시스템화되었을 뿐 아니라 쓰레기 처리 방식(올바로 시스템)조차 상당히 체계화되고 시스템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만들기
건축분야에서도 조립식 주택, 프리케스팅 콘크리트, 시스템 비계, 시스템 거푸집 등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져서 제품의 질도 높아지고, 생산성, 전문성이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주물로 찍어내듯 유로폼 거푸집에 레미콘을 부어 콘크리트 건축물을 만들다가 이제는 거푸집도 시스템화시켜서 대량화 규격화가 이루어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간혹 ‘서예를 한번 배워볼까?’하다가 그 ”느림”에 다시 손사래 치며 ‘괜한 짓(?) 하지 말자’하고 고개를 돌려 버립니다. 어릴 적 추억도 되새기며 ‘수채화를 한번 배워볼까?’, ‘조각칼 하나 구입해서 목공 조각하는 거 해볼까?’, ‘나 원래 만화 잘 그렸는데 만화 드로잉을 취미로 한번 해볼까?’, ‘목공예 한번 해 볼까?’, ‘자전거에 모타를 달아서 전동자전거를 만들어 볼까?’, ‘인터넷으로 드론자격증 따놓았는데 드론 기술을 익혀볼까?’, ‘영상편집이나 자막번역을 해 볼까?’
“아, 아, 아, 아, 그만!
이런 거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긴다.
그만 생각하자!”
“기다림”을 갖기엔 제가 너무 멀리 와 있는 것 같습니다. 삶이 힘들어서 일까요? 여유를 갖기엔 너무 조급합니다. 빨리, 대량으로, 더 많이 확보해야 합니다. 시간이 가기 전에 주어진 과업을 끝내야 합니다. 이미 제 머리는 시스템화되어 있어서 느리고, 반복되고, 비생산적인 일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너무 많이 우울합니다. 속도는 빨라졌는데 허무함은 더 많이 찾아옵니다. 완성은 한 것 같은데 마음은 원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문제를 해결했는데 실타래는 아직 어딘가에 있는 것 같습니다.
데미무어가 도자기를 빚는 모습으로 이제는 나의 물레에 다시 앉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하나 만들어 가는 것을 다시 익혀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게 맞는 것 같습니다.
나에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