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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엔디 May 11. 2024

나보고 요리를 하라고?

  제 아내는 음식을 잘합니다. 고급요리를 잘한다기보다는 음식의 간도 잘 맞추고, 짧은 시간에 후다닥 요리를 만들어 제법 그럴싸한 저녁식사를 내어 놓곤 합니다. 결혼을 약속한 후에 이미 병환으로 작고하신 장모님이 자리에 누워서 저만 혼자 불러 조용히 말씀을 주신 적이 있습니다. “우리 미숙이 잘 부탁하네, 저 아이 정말 아무것도 할 줄 몰라 자네가 잘 이해하고…..”하면서 제 손을 잡은 것이 마지막 유언이 되었습니다.


  결혼 후, 어머님의 말씀이 진심이었던 것을 아는데 얼마 걸리지 않았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할 줄 몰라서 일 년 동안 계란볶음밥만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보통 결혼하면 아내와 음식맛이 달라 힘들어하는 사람을 많이 보게 됩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시댁생활 1년 동안 우리 어머님께 배운 음식 조리법 때문에 지금은 아내에게서 “우리 엄마”의 향기가 납니다. 젓갈 안 들어간 김치며, 고추장 된장찌개며, 심지어 감자조림까지도 싱크로율 99.5%입니다. 백지상태에서 시작해 배운 요리 때문에 덕을 본 사람은 제가 아닐까요?


  저는 식습관이 꽤나 까탈스럽습니다. 뭐 특별한 것은 아니고, 해물류의 비린 음식을 못 먹으니까 멸치로 우려낸 육수나 생선 젓갈을 이용한 것은 먹을 수가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그런 음식에 길이 들어있어서 군대를 다녀와도 고칠 수 없는 것이 아마 내 유전자 속에 확고하게 "거절인자"가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입맛이라고 보면 딱 맞을 것 같습니다. 소위 말해서 어른(?)들이 먹는 음식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내가 볼 때 제가 힘이 없거나,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깍두기 형태의 감자조림을 해 놓습니다. 다른 반찬도 필요 없고, 흰밥에 감자조림 하나면 훌륭한 식사가 됩니다. 초등학교 시절 엄마가 해주던 도시락 반찬 중에 늘 있었던 감자조림이랑 똑같은 맛이라서 그런 걸까요? 저는 감자조림을 먹으면 행복해집니다. 굳이 과거를 들먹일 필요는 없겠지만 나도 모르는 어떤 향수가 있는 듯합니다.


  아내의 빵 만드는 기술도 날로 발전하는데, 빵 굽는 이야기만 해도 족히 책 한 권을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식탁 위에 한가득 쌓여 있는 카스텔라 한 무더기, 이웃과 친지들에게 전달할 포장된 카스텔라가 줄이 맞춰 놓여 있습니다. 물론 퇴근해서 집에 오면 대부분 배달이 완료되었고, 내게 남은 건 “달기 달고 달기 단 꼬다리 빵”뿐입니다.

 어느 날 아내가 제 책상으로 오더니,

"나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 거야?"

"뭔데?"

"들어줄 거야?"

"이야기를 하라구! 뭔데?"

"내 생일날 아무것도 안 해줘도 돼, 딱 한 가지....."

"......."

"당신이 연구해서 나한테 요리하나 만들어줘!"

"두둥~"

平平淡淡才是福,家家有本难念经《帝范》
평범하고 담백한 것은 축복이며, 모든 가족이 경전을 암송하기는 어렵습니다《제범》

  당태종 이세민이 치국의 도(治國의 道)로 저술한《제범》이란 책에 등장하는 말입니다. 차려주면 먹고, 안 차려 주면 안 먹고,  이렇게 만들고 저렇게 만들고,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아내의 주방일에 가끔 설거지 정도 도와주면서 제3자적 관점에서  논객이 된 지 어언 30년, 주방일에 대해서 지극히 평범하고 담백하게 지내면서 독백하길...

'모두 다 자기 기질에 맞게 사는 거지......,
나는 요리하고는 안 맞아!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는 거 아니겠어?'

  간혹 아내가 넋두리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듣습니다. "나중에 사위가 셰프면 얼마나 좋을까?" "하원아! 너 주변에 셰프 있으면 만나봐라!"  


  아마 여자의 로망 중 한 가지가 다른 사람이 차려준 요리를 먹으며 차 한잔 마시고, 우아하게 친구들과 담소하는 모습인가 봅니다. 여행 가서 여자의 가장 큰 행복은 호텔에서 차려준 조식을 먹으러 내려가는 것과 뒷정리 없이 가벼이 자리를 걷어내고 오늘은 어디 가서 쇼핑할까 상상의 나래를 피며 아메리카노 한잔 마시는 즐거움이 바로 그것이죠.


  그런 로망을 "생일"이라는 무기로 내게 겨눌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아내의 생일까지 남은 시간은 2개월 남짓..... D-60일,  유튜브와 요리책을 봐야 할까요? TV 요리 프로그램을 찾아봐야 할까요? 레시피대로 한번 해 보면 성공할까요? 정말 내가 요리까지 섭렵해서 정말 멋들어진 생일상을 차릴 수 있을까요?


" 하나님! 왜 저한테 매번 이런 시련을 주시나요? "


  하나님 왈(曰),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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