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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엔디 May 19. 2024

아빠의 가장 따뜻한 계절이 될래

딸이 보낸 13년만의 답글

96년생 딸이 태어난 후, 함께했던 이야기를 조금씩 일기형식으로 써 왔습니다. 아이가 성장하면서 부모와 자식사이에 소통의 문제가 생긴다면,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자녀에게 책으로 건네주고 싶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책을 만들어서 줘야 할 때라는 것을 직감한 것은 2009년이었습니다. 그동안 써 왔던 일기를 출력해서 제본하고, 다시 책머리에 아래와 같은 편지를 써서 딸에게 전달했습니다. 물론 기대와는 다르게 딸아이는 당시 감동이나 감격도 없었고, 그냥 책꽂이에 보관만 했던 거지요. 그 후 졸업을 하고 직장인이 될 때까지 수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13년이 지난 2022년 5월, 딸 하원이는 제가 쓴 일기 중 몇 개를 골라 답글형식으로 아빠에게 전자책으로 내용을 엮어 선물을 했습니다. 딸아이가 몇 년간 전자출판업에 종사했던 터라 나름 독특한 선물이 되었습니다.   



2009년 7월 아빠로부터.

이 세상에서 아빠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생각만 해도 눈물이 흘러내린다. 눈물은 슬플 때만 흘리는 줄 알았는데... 너무너무 사랑하니까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눈물이 흐른다. 회사에 출근해서 자리에 앉아 있으면 하원이 생각이 난다. 퇴근할 즈음에 산속으로 떨어지고 있는 태양을 보며 집으로 향할 때도 하원이 생각이 난다. 하원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엄마 아빠와 함께한 많은 시간들이 너무너무 귀하고 소중했다. 그리고 간직하고 싶었다. 그래서 하루하루 생각날 때마다 일기를 쓰곤 했다.


그리고... 언젠가 하원이가 중학생이 되면 그것을 책으로 만들어 주고 싶었다. 매일매일 썼더라면 더 훌륭한 책이 되었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하원이가 중학생이 되었다. 이제 세상을 향해 자기만의 힘든 싸움을 싸워야 하기 때문에... 어쩌면 고독한 싸움이 될 수도 있고, 여기저기 마음의 상처도 받으면서 걸어가야 한다. 하지만 엄마, 아빠는 언제나 하원이를 응원한다... 그리고 믿는다.

2022년 5월 아빠의 사랑으로부터.

어느덧 세상에서 제일 강하고, 든든했던 아빠의 뒷모습에서 외로움을 보는 나이가 되었다. 내게 세상이었고, 전부였던 아빠의 희끗해진 머리카락을 볼 때면 눈물이 날 것만 같다. 나를 너무 사랑해서 눈물이 났다던 아빠. 나도 아빠를 너무 사랑해서 눈물이 나는 걸까. 조금 더 오래. 아니 아주 오래. 계속 나와 함께해 주었으면 하고 매일 바란다. 이건 아빠의 세월과 사랑을 먹고 훌쩍 자라난 아빠 딸 하원이가 쓰는 일기.



2001.07.24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습니다.

가끔 아쉬울 때가 있습니다. 애교만점인 하원이... 가장 말 안 듣는 6살인데도.. 이것저것 떼를 쓰고.. 조잘조잘 엄마 아빠에게 떠드는 그 모습이 사랑스럽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현재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안타까움으로 꼭 안아주곤 하지만... 지나가는 하루하루를 어쩔 수 없이 바라봅니다. 커가는 모습에 자랑스럽기도 하지만 못내 아쉬움이 가슴속에 파고듭니다. 하원이가 아장아장 걸을 때는 손잡고 에버랜드 가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여러 번 실현했고, 행복했습니다........ 하원이가 좀 더 크면... 영화, 연극, 뮤지컬, 여행 등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멋있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주안에서 아름다운 가정. 행복한 가정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멋있게 살아가는 하원이, 성원이가 되길 기도합니다.


RE :

이것저것 떼를 쓰고, 조잘조잘 엄마 아빠에게 떠들던 꼬마 하원이. 아빠는 그 순간이 지나면 볼 수 없는 모습

이라며 안타까워했지만 나는 지금도 아빠한테 떼쓰고, 조잘거리는 27살...ㅎㅎ 내 첫 영화, 연극, 뮤지컬은 다 아빠와 함께였는 걸. 나한테 가장 멋있는 사람은 아빠라, 아빠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데도 아직은 아득하기만 해. 그러니 계속 내 옆에서 알려줘.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하는지. 내 삶의 이정표는 아빠니까.


2002.03.16 우리 아빠는 내가 사달라는 거 다 사준다!

하원이는... 친구들과 같이 있을 때 아빠가 있으면 너무나도 자랑스러워합니다. 연신 우리 아빠는~... 우리 아빠는~... 하면서 손을 잡기도 하고 애교도 부려봅니다. 어느날...이었슴다... 하원이가 아빠에 대해 또 자랑을 하는 것이었슴다.

"우리 아빠는 내가 사달라는 것 다 사준다~! 아빠! 아빠는 내가 사달라는 거 다 사주지 이이~~잉? "

"그으럼! 아빠는 하원이가 사달라는 거 다 사주지... 하원이가 예쁘니까!"

저도 자랑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며 맞장구를 쳤습니다.

"아빠!"

"왜?"

"아빠! 나~ 햄스터 사 주세요...!"

"어..? 어어 그 그 그래... 8살 되면 사 줄게.... "

$*@^#*^#


RE :

"아빠 나 강아지 키우고 싶어"

"강아지 사조 강아지 강아지~~~~~~"

8살이나 27살이 되서나 변함없는 딸내미에게 가장 약한 아빠는 결국, 강아지를 안겨주고야 말았지. 햄스터를 사주는 게 싸게 먹혔을 텐데 말이야 ㅎㅎ

"우리 아빠는 내가 사달라는 거 다 사주지~"

하며 친구들에게 또 신나게 자랑했다니까. (엄마한테 비밀인데 어쩌지)

어릴 때나 지금이나 또 앞으로도 내 가장 자랑은 아빠인 걸 기억해 줘. 커 가면서 갖고 싶은 건 변해도 이것 하나만큼은 변하지 않을 거야. 내가 무척이나 아빠를 자랑스러워한다는 사실 말이야.

2002.11.12 잠꾸러기 하원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어려서부터 잠이 많더니 결국.... 유치원도 지각을 합니다. 간신히 눈 비비고.. 일어나.. 엄마한테 야단맞아 가

면서... 유치원 가는 모습이 어렸을 적 저의 모습을 보는 것 같네요...... 새벽녘에 하원이 방을 들여다보면 이불을 걷어차고 곤히(?) 잠든 모습을 바라봅니다. 춥지 않도록 잘 덮어주고 잠자리를 봐주고 나올 때면.... 행복은 "내 마음"속에, 그리고 "포근한 이부자리"속까지 파고듭니다.  하원이가.... 말하길.... "아빠! 저는요~ 나중에 시집가서도 아빠한테 재워달라고 할 거예요..!" ^^;; 두고 볼 일입니다. 하하!


RE :

자기 전 아빠가 긁어주던 등. 또 아빠가 틀어주던 성경 말씀. 커서도 나는 아빠랑 잘거라며 호언장담하던 내 모습. 그때의 분위기와 기분이 아직도 생각나고는 해. 특히, 악몽을 꿀 때면 아직도 아빠가 틀어주던 성경 말씀이 얼마나 간절해지는지 몰라. 등이 간지러울 때도 ㅎㅎ 하여간 나이를 먹어도 똑같다니까. 그러니까 아직도 간신히 눈 비비고 일어나 출근을 하는 건 전부 아빠 때문이야. 그때의 기분이 너무 따뜻해서 이불을 걷어내지 못하는 거니까.


2003.05.08 매일매일 커가는 모습에 아빠는 너무 흐뭇하단다.

키도 커가고, 생각도 자라는 우리 하원이가 이제는 좀 더 어른스러워졌으면 한다. 때때로 아빠가 하원이에게 화내고, 큰소리치는 것은 하원이가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귀여움을 받는 딸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란다. 하원이는 똑똑하니까 아빠가 하원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알겠지? 어떤 때는 하원이를 보면 너무너무 사랑스러워서 아빠 눈에 눈물이 고일 때가 있단다. 하원이도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이니까 엄마 말씀 잘 듣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은 자기가 꼭 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름다운 동산의 풍요로움과 끊어지지 않는 샘과 같은 하원(河園)이로 성장하면서 하나님사랑을 경험하고, 큰 마음과 소망을 만들고 이루어가는 사람이 되길 다시 한번 기도해 본다. 하원이가 자주 쓰는 말, 아빠도 한번 써볼게... 하원이 "파이팅"


RE :

아빠 그거 알아? 나는 항상 내 이름이 좋았어. 물 하(河) 자에 동산 원(園). 동산에 있는 물처럼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니, 얼마나 멋진 이름이야. 내 이름에 걸맞게 살려면 얼마나 멋진 사람이 되어야 되는 걸까 생각한 적이 있어. 아무래도 내 이름보다 내가 부족한 것 같아서. 나는 그때보다 키도 크고, 생각도 자랐지 만 아무래도 아빠의 바람을 이루기엔 아직 멀었나 봐. 그래도 한 가지. 나는 그때도 지금도 똑똑해서 아빠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잘 알아. 언젠가 내가 아빠에게 동산의 물 같은 사람이 되어줄 수 있다면 내 이름에 걸맞은 사람이 된 게 아닐까 생각해. 그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하고 기도해. "파이팅“


2005.10.10 질풍노도의 시기?

생각보다... 빨리 오는 것 같습니다. 마냥 귀엽고, 사랑스럽고, 장난꾸러기로만 여기던 하원이도.. 가정과 부모의 영역이 주는 영향력보다는 이제는 친구, 학교, 선생님이라는 새로운 환경이 더 큰 자극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체감적으로 알게 됩니다. 모든 것을 용납하고, 믿고, 받아들이는 너그러운 아빠는 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바른 것, 하나님이 주신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그런 아이로 자라나도록 훈계하는 데는 게을러지고 싶진 않습니다. 하원이, 성원이가 계속 초등학생으로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지옥 같은 중고등학교와 정처 없이 방황하며 목적도 없이, 비전도 없이, 하루하루 삶을 연명(?)하는 주변의 청소년을 보면서 아탑깝기도 하고, 더럭 겁이 나기도 합니다. 그래도 예수님이 우리 가정에 주인 되시니 감사하고, 고맙고, 힘이 됩니다. 아빠의 역할을 잘해야 할 텐데 말이죠... 엄마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할 텐데 말이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올바른 방향을 바라보는 눈을 열어줘야 할 텐데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 속에 그분의 자녀 됨을 느끼게 해 줘야 할 텐데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무수한 진리의 샘을 맛보게 해 줘야 할 텐데요.


RE :

나는 가정과 부모의 영역이 주는 영향력이 나에게 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엄마 아빠는 고지식하고, 지금 우리 세대의 흐름을 쫓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아빠, 다 착각이었어. 그때 엄마 아빠의 사랑이, 그리고 교육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어. 어느 것 하나 엄마 아빠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더라고. 내 가치관마저도. 돌고 돌아 나는 결국 엄마 아빠의 뒷모습을 좇고 있어. 엄마 아빠 가 내게 물려준 최고의 재산이야.


2007.01.20 전철 타고 하원이랑 오랜만에 상경(上京)했습니다.

종로타워 앞길을 걸어가며 광화문네거리에 이순신장군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어주고, 교보문고 가서 꼭꼭 지갑 속에 숨겨두었던 도서상품권으로 하원이 성원이 책도 사 주었습니다. 하원이 5살 땐가 한번 데리고 왔었는데.. 기억이 전혀 안 난다네요..ㅠㅠ. 마침 밖에 기온도 그리 차지 않은 터라.. 하원이랑 경복궁에 갔습니다. 여기저기 궁(宮)을 돌면서 사진도 찍고, 경회루 연못가에서 역사적인(?) 기념사진도 한컷 찍었지요..^^ 이제 하원이도 많이 커서 제법 데이트하는 기분이 좀 납니다. 연신 걸으면서 다리 아프다고 하면서도 잘도 따라옵니다. 무릎연골이 다 닳으면 어떡하냐고 협박(?)하면서 말이죠...ㅎㅎ 절대 안 업어줬죠...!


차갑게 시린 하원이 손을 내 옷 주머니에 함께 넣고, 북한산기슭에서 내려오는 따스한 햇살이 궁궐 흙을 가만히 만지게 합니다. 오후 7시경에야 다리가 아프다고 아빠한테 업히는 하원이.... 야단은 쳤지만 6살 때 아빠 등에 업혀 포근히 사진 찍힌 모습을 생각하며.... 이제는 13살 된 큰 딸을 등에 업고... 운현궁 앞길로 종로 3가까지 걸었습니다. 내게 있어 고향과 같은 강북의 옛 거리들.... 내 딸과 함께 걷고 이야기하고, 시간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많은 것을 보여주고 싶고, 더 넓은 것을 보게 하고 싶고, 더 높은 것을 꿈꾸게 하고 싶은 아빠의 마음을 하원이가 알까....? 몰라 준다 해도 좋습니다.... 단지 오늘의 시간이 내게 있음이 감사하기에.


RE :

광화문 네거리에 이순신 장군도, 그때는 정말 커 보였던 교보 문고의 위용에 놀랐던 것도, 경복궁에 가서 아빠한테 무릎 연골 이 다 닳아 없어질 것 같다며 업어달라고 칭얼대던 것도. 그 시린 겨울 가장 따뜻했던 기억이야. 종종 친구들과 놀러 갈 때마다 익숙한 기시감이 들어 생각해 보면 아빠랑 전부 와봤던 곳이라서 그랬던 거지. 아빠랑 함께했던 그 순간이 내겐 가장 따뜻한 계절이라 지나온 추운 겨울들을 이겨낼 수 있었어. 그러니까 올겨울엔 다시 한번 경복궁에 가자. 이젠 내가 아빠의 가장 따뜻한 계절이 될래.


2022년 27살의 하원이가.

어제 아빠랑 많은 대화를 나눴다. 우리 아빠. 진짜 멋있는 사람이었구나 생각했다. '믿음'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느끼게 되는 순간이었다. 아빠는, 그래 내 아빠였구나. 하고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기분. 그러고 보니 아빠가 참 늙어있었다. 어릴 때 내가 보던 아빠는 힘도 세고 못하는 것 하나 없는 슈퍼맨 같은, 내 세상에 전부 같았던 사람이었는데 머리가 크고 세상의 다른 것들을 경험하며 나도 모르게 아빠는 고지식한 사람. 옛날 사람. 지금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교만했다. 내가 다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다 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아빠를 보니 내가 얼마나 오만했으며 어렸는지 느끼게 된다. 아빠가 나를 얼마나 믿어주고 있었는지, 사랑해 주고 있었는지, 그리고 아직도 내 세상은 아빠로 인해 만들어지고 있었음을. 그러기 위해 아빠는 얼마나 무거운 짐을 끌어안고 있었을지. 아빠라는 이름의 부담감과 책임감을 이제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 아빠의 왜소해진 뒷모습이, 하얗게 변해버린 머리카락이 그동안의 아빠의 삶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아 조금 서글픈 기분이었다. 아빠가 내게 주었던, 그리고 주고 있는 사랑을 감히 그 어디에 비교할 수 있을까. 아직까지도 나는 아빠의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는 걸. 어떤 말도, 어떤 수식어도 대체할 수 없는 '아빠'라는 단어가 내 마음을 아릿하게 만든다. 언젠가 내가 아빠에게 쉴 곳을 만들어주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사랑해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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