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호에서 탈출하기
"아침밥 먹고 세면장 집합!" 가뜩이나 먹기 싫은 배추된장국을 뜨는 둥 마는 둥 허겁지겁 입에 구겨 넣고, 먹다만 황토색 플라스틱 식판을 들고 일어선다. 성질이 보통 아닌 군기당번 고참병의 아침 호출이다. 식당 근처 뒤편으로 돌아가면 6~7명이 함께 씻을 수 있는 막사 같은 세면장이 있다. 길이는 6미터 정도에 폭은 3미터로 좁은 곳이다. 가끔 신병이 들어오면 군기를 잡기 위해 으레 거쳐가는 코스이기도 하다. 무슨 심사가 뒤틀려서 월요일 아침부터 호출인가 말이다. 그 좁은 공간에 20여 명이 긴장한 얼굴로 꾸역꾸역 들어온다.
세면장에 들어서자마자 군기당번 고참이 자기 동기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하면서 '퍽'소리가 난다. 자기 동기한테 까지 주먹질을 할 정도니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다. 원래 군대에서 고참이 화내는 이유들은 단순하다. 예를 들어, 사물함에서 누가 내 건빵을 가져갔냐고 세상 들어보지 못한 욕을 하면서 '줄빠다'를 일삼는 곳이 '싸나이'들의 군대문화였다. 왕고참이 어제 축구경기에서 진 것이 원인이다.
사회에선 들어볼 수도 없는 기상천외한 욕을 여기에 쓸 수 없다는 것이 아쉽긴 해도 아무튼 폭풍 같은 욕을 해대며 한 사람씩 주먹으로 가슴을 때린다. 좌측에서 우측으로 한 사람씩 이동하면 풀스윙으로 그 독기 품은 짐승이 가슴을 가격한다. 3미터 폭의 통로라 세면대 공간을 제외하면 한 사람이 간신히 통과할 수밖에 없다. 내 차례가 다가온다. 퍽, 퍽, 퍽, 퍽....... 내 차례다.
그런데....
가슴을 맞고 우측으로 이동한 사람이 좁은 공간으로 이동하다 보니 흐름이 갑자기 엉키면서 내 동기가 한번 더 가슴을 가격 당하고, 나는 자연스럽게 밀쳐지면서 맞지 않은 상태에서 우측으로 밀려들어갔다. 흥분한 짐승은 눈치를 못 챘고, 그렇다고 이 억울한(내 동기입장에서) 일을 고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있을 수 없는 일이 내게 일어났다. 나 대신 두 대나 맞은 내 동기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5월에 논산훈련소에 같이 입대해서 자대까지 배치받은 내 동기는 나를 포함해서 모두 4명이다. 바로 위에 선임이 우리보다 2달 빠른 3월 군번으로, 2명이 바로 위 고참이다. 어떤 조직이든 직속상관이 제일 무섭고 독한 법이다. 일명 작대기 두 개 일병시절 우리 4명에게 군기를 잡으려고 일과 후에 자재창고에 집합하란다. 또 올 것이 왔다. 저녁식사를 하고, 저녁 점호 전까지 3-4시간의 자유시간이 있는데 우리 4명은 그 시간에 기름냄새 진동하는 불 꺼진 창고로 가야 한다.
두려운 마음으로 서로를 위로하면서 착고찬 죄수모양으로 두꺼운 철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놈들이 벌써 기다리고 있다. 관등성명부터 소리 지르게 하더니 제법 능숙한 조교처럼 흉내를 내면서 기선을 제압한다. 고작 2달 먼저 입대한 선임이 이렇게 무섭다. 심지어 나이도 우리보다 어리다.
고압적인 자세로 이행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린다. "야! 저기 서랍 열어!" 앞에 있는 조그만 공구 서랍이다. 첫 번째 지목된 동기가 앞으로 나선다. "야! 저 서랍 속으로 들어간다! 실시!" 뭐 이런 개똥 같은 지시가 있는가? 그것이 예전의 군대였다. 내 사랑스러운 동기 한 명이 서랍 속으로 들어가려고 몸부림친다. 뒤에 서 있는 우리는 우습기도 하지만 '이제 시작되었구나'하는 죽음의 전조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다시 재차 구령이 떨어지고 우리 4명은 큰소리로 복명복창을 외쳤다.
그때!!! "누구야! 지금 거기서 뭣들 하는 거야!"
바로 뒤편이 BOQ(Bachelor Officer Quarters)로 장교숙소였고, 마침 장교 한 사람이 소리를 지른다. 겁에 질린 선임 2명이 급히 상황을 종료시키고 내무반으로 들어가라고 한다. 상황 끝! 오늘도 안 맞았다!
거사에 실패한 선임이 다시 날짜를 잡는다. 저 놈들이 그냥 넘어갈 것 같지가 않다. 분명히 한번 기회를 잡을 것 같은데 내무반 서열이 낮기론 우리랑 피차일반인지라 고참들 눈치를 좀 보는 것 같다. 이제나 저제나 기회만 엿보던 놈들은 마침 날짜를 잡았다. 역시 저녁 늦게 야간점호가 있기 전 으스름한 밤을 택했다. 장소는 지난번의 실패를 교훈 삼아 막사와 많이 떨어진 부대 뒤편 담장아래 탄(炭) 창고가 있다. 집합장소는 거기였다. 우리 동기 4명은 '이번엔 그냥 맞자!' 하는 생각으로 어스름한 밤을 추적추적 걸어가며 탄창고에 도착했다.
역시 먼저 와서 대기하고 있다. 삐그덕 문이 열리고 바닥은 석탄가루로 질퍽거리듯 시커멓다. 연탄광에서 나는 특유의 탄소알갱이 냄새가 코 끝에서 스멀스멀 감겨 올라온다. 이번에도 관등성명과 복명복창으로 기선을 제압한다. 창고 안이 어두워서 공포감이 더 몰려온다. 이놈들은 지난번처럼 시간을 끌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미 손에는 몽둥이 한 자루씩 들고 있다. 아마 가장 빠르게 분풀이를 하고, 오랜 숙원사업(구타와 군기확립)을 끝마치려고 하는 것이 틀림없다. 이미 각오하고 왔으니 구타의 강도만 걱정될 뿐 떨리는 마음으로 관등성명을 외친다. 이제 몽둥이로 타작을 시작하려던 참에......
지금 뭐 하는 건가?
문이 열리고, 어릿한 달빛아래 내무반 고참병장이 들어온다. 야간 경계근무를 서고 있던 그 고참이 창고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경계근무 중 들어온 것이다. "교육을 좀 시키고 있습니다."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궁색한 답변을 내어 놓는다. 분명 그도 나이로 따지면 고만고만할 텐데 군대에서 느껴지는 고참은 아버지뻘 연장자처럼 느껴진다. 인자한 목소리로 "이런 거 하지 마라~ 다들 일어나고 내무반으로 들어가!" 엎드려뻗쳐있던 우리를 일으켜 세우고 그놈들을 무게감 있는 어투로 짓누르며 내무반으로 빨리 들어가도록 지시한다. 머쓱해진 그놈들도 쭈빗쭈빛 우리 뒤를 따라오고, 부끄러움은 그네들 몫이 된 아름다운 밤이었다. 나는 또 안 맞았다!
나그네와 같은 인생길에서, 흡사 전쟁터 같은 폭격과 공습이 매일 우리를 공격할지라도, 두려움과 절망, 그리고 아픔이 우리를 혼미하게 할지라도, 하나님은 예상치 못한 기적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일상의 삶을 살 수 없을 것 같은 위기 속에서 하나님은 다시 내게 기회를 주시고, 피할 길을 주십니다.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