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수(治水) - 상상이 현실이 된다
1934년생 울 아버지는 최고기술경영자(Chief Technology Officer)입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서 초등교육도 받지 못한 무학력자입니다. 가난하고 배운 것 없고 집안배경 없는 그야말로 지지리도 못살다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돈 버는 재주는 없는데 바둑 잘 두시고, 부지런할 뿐 아니라 필체가 한석봉 다음가는 명필이다 보니 남이 보는 앞에서 펜을 들고 글씨 몇 자 써 내려가면 그 옛날 고등학교정도는 나온 사람처럼 보입니다. 평생 국가고시(?) 응시하다 70이 넘어서야 운전면허 합격한 의지의 한국인이죠.
여든이 넘어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겨울날, 그토록 애지중지 여기는 자동차 도어가 열리지 않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전자식 자동차가 아니다 보니 열쇠를 이용해 열어야 되는데 도어록장치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성격 급한 당신은 부리나케 카센터, 보험긴급출동서비스 등 여기저기 전화해서 기술자를 불러 고치려는데 쉽지 않았던가 봅니다. 차를 공업사에 입고시켜 고쳐야 될 것 같다고 하면서 모두 그 원인을 모르겠다고 돌아갔습니다.
밤새 잠을 못 자고 뒤척이던 아버지는 멍키스패너 하나 들고나가 도어록 쪽을 살짝살짝 두드리더니 결국 도아를 열어냈습니다. 밤새 상상을 한 겁니다. 어디가 문제일까? 왜 안 열릴까? 이리저리 고민하다 번뜩 생각난 것이 살얼음이 도어록에 껴있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간 것이고, 자동차문에 약한 충격을 줘서 살얼음이 떨어지도록 하면 해결되지 않을까 해서 공구하나 들고 그 야밤에 주차장으로 내려갔고,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예상이 적중했고,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예전에 "집"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바람 안 들어오고, 안 춥고, 안 새면 된다"였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흥부집처럼 한방에 모여 살며 발이 벽 밖으로 나가지만 않으면, 쉘터기능으로서의 집은 만족할만했습니다.
최근에 짓는 집은 건축법상 단열에 대한 기준도 높아졌고, 에너지절약차원에서 열손실방지에 따른 각종 제도와 규정 때문에 어린 시절 많이 겪어봤던 "웃풍"이라든지 창호지를 뚫고 들어오는 "황소바람"은 없어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층고가 웬만큼 높지 않다면 난방에도 거의 문제가 없습니다. 비용이 들어서 문제지 기능적으로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장치는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누수(漏水)란 놈은 예나 지금이나 골칫덩어리입니다. 천정에서 떨어지는 물을 양동이로 받으면서 잠을 자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도 누수로 인해 머리 싸메는 건물주는 한집 건너 하나씩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입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이 이 뜻과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건물의 디자인이 복잡해지고, 여러 가지 다양한 자재로 집을 꾸미다 보니 고려할 디테일은 계속 늘어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누수라는 악마는 그 디테일로 숨어 들어옵니다. 그 악마를 잡아내야 하는데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일단 들어오면 그 꼬리를 잡을만한 장치가 특별히 없습니다.
집을 지을 때 가급적 공사진행 사진을 많이 확보해 놓는 것이 좋습니다. 하자의 요인이 될 수 있는 부분은 특히 많이 찍어두면 나중에 원인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공사과정을 계속 지켜볼 수 없기 때문에 관리자나 감독을 통해 요청을 하고, 시공사 입장에서도 하자처리를 위해 많다 싶을 정도로 여러 방향에서 사진을 확보해 두면 후일에 상당한 도움을 받습니다.
이 "물"이란 놈은 영화 "인크레더블" 엘라스티걸(Elasti-girl)처럼 작은 틈새만 있으면 몸을 늘려 귀신처럼 빠져 들어옵니다. 이렇게 단서가 될만한 사진을 확보한 후 확인할 수 없는 영역은 상상이 시작됩니다. 취약한 부분을 머릿속에 그리고, 디테일을 생각하고, 물의 흐름을 예상합니다. 그리고 확신이 생기면 그곳을 보수하거나 원인이 될만한 것을 사전에 차단하면서 물의 예상 침입로를 다른 쪽으로 유도하는 것이죠. 가끔은 그 예상이 적중해서 대단한 "성취감"을 갖기도 합니다. 난제를 풀었다는 해방감 같은 거죠. 의사도 우리 몸의 아픈 곳을 진단할 때, 갖고 있는 의학지식으로 상상하지 않으세요? 그리고 그 예견이 적중하면 치료가 되는 것입니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경영자들의 운영방식에 따라 유난히 어느 한 부분에 집착하는 상사들을 접하게 됩니다. 돌아보면 우스운 일이기도 하지만, 당시로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당황스럽게 하기도 하고, 간혹 스트레스로도 작용하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유난히 사무실 전등의 점멸상태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이고, 어떤 분은 화초, 어떤 분은 심지어 회사 정문의 개폐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고, 그 일만을 위해 몇 시간의 일과를 허비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일련의 행태들은 사소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정작 본인은 그 일에 대단한 가치를 부여하는 경우가 많으며, 사무실의 정체성까지 확대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 이유로, 어떤 때는 그 일로 분노하고, 어떤 때는 사원을 질책하는 수단으로 그것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심리현상은 과거의 경험과 무의식의 상처 속에 형성된 잘못된 자아라고 할 수 있겠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현대인의 어느 누구에게도 이런 일들에서 예외일 수 없는 듯합니다.
집을 지을 때 기술자로서 누수 방지에 대한 집착은 필요하리라 봅니다. 한번 누수가 진행된 곳을 찾아내기란 보통 힘든 과정이 아닙니다. 반은 성공하고 반은 실패합니다. 차라리 부수고 다시 짓고 싶다고 분통을 터트리는 건물주도 있습니다. 상상은 준공 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건축하는 과정 속에 집착한다 싶을 정도로 관심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고민하고, 예상하고, 대책을 세우고, 집착하면서 오늘도 저는 누수라는 악마와 싸움을 시작합니다.
후회 하나
거실에서 아버지가 TV홈쇼핑을 보면서
"얘! 나 저거 강력접착제 하나 사고 싶은데..."
"저게 뭐가 필요해?!"
아버지 말씀을 무시하고 그냥 넘겨버린 일이
아직도 가슴 아프고, 한없이 죄송합니다.
그거 하나 주문해 드리면 될것을……ㅠㅠ
최고기술자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