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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엔디 May 21. 2024

수채화 그리 듯 집짓기

긴급한 마음의 횡포

횡단보도 신호등이 5초 남아 있으면 뛰시나요? 이젠 안 뛰려고 합니다. 이런 것조차 노력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이상하지만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이 조급함의 문제를 모두 인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원인에 대한 역사적, 환경적, 심리적 요인에 대해 논문 한 편 써낼 정도로 전문가가 되어있습니다. 그런 탓에 조급함에 대해 이야기할라치면 웃음 한번 씨익 하고 "우리나라 사람은 다~ 그래! 하하하"하면서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립니다.

서울시는 안전한 교통환경 조성과 보행 편의 증진을 위해 '적색 잔여 시간 표시 신호등'을 시청 주변과 광화문 월대 앞 등 5곳에 시범 설치했다고 21일 밝혔다. 적색 잔여 시간 표시 신호등은 기존처럼 녹색 신호 횡단 잔여 시간뿐 아니라 적색 신호의 대기 잔여 시간까지도 알려주는 신호등이다. 다만 보행자가 신호가 바뀌기도 전에 미리 출발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적색 신호 종료 6초 이하가 되면 잔여 시간이 나타나지 않는다. <출처: 중앙일보 2023.12.21 한지혜기자 >

이제는 적색신호등까지 잔여시간을 표시해서, 기다리는 사람도 조급해 하지 않고 무단횡단에 따른 사고도 예방한다는 차원에서 시행하려는 지경(?)까지 왔습니다. 물론 조사에서 보행자의 만족도도 72%나되고 무단횡단도 46%나 감소했다는 긍정적인 효과로 보아 관계실무자들의 창의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좋아했던 과목의 순서를 정한다면 미술, 체육, 자연, 국어 순입니다. 산수는 언급조차 하기 싫고요. ㅎㅎ 확실히 어렸을 때 저의 기질은 예체능계였었던것 같습니다. 특히나 미술시간이 많이 기다려졌는데 미술과목이 있는 요일은 마음이 설레기까지 했으니 저는 엔지니어 쪽보다는 예술적인 인자(?)가 좀 있는 듯합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미술시간에 수채화 물감을 파렛트에 짜놓고, 물을 묻혀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안 그려집니다. ㅠㅠ

공부도 잘하고 집도 부유한 저쪽에 앉은 친구는 한눈에 봐도 미술학원에서 배운 것 같은 공력(?)으로 벌써 멋들어진 수채화 그림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왜 난 안되지?' 선생님이 탁자 위에 올려놓은 꽃이랑 과일을 그려야 하는데 수채화만이 갖는 독특한 번짐과 스며듬의 기법을 좇아갈 수가 없었던 거죠. '으~화가 난다 화가 나!' 붓에 묻힌 물의 양과 도화지에 번지고 스며드는 물감의 터치 그리고 물이 마르고 덧칠하는 시점의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수채화의 기본적인 지식이 부족했던 거죠.


주어진 시간에 공사를 마무리하기 위해 공정관리라는 것을 하게 됩니다. 예정공정표를 작성하고, 자금집행계획을 세웁니다. 천재지변에 따른 돌발변수를 제외하더라도 가능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공기단축을 시도합니다. 공기의 지연은 공사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 탓에 PERT(Program Evaluation and Review Technique)나  CPM(Critical Path Method)은 일정을 계획하고 공정을 관리하는 기법으로 개발된 방법들입니다. 공사일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크리티컬 패스(Critical Path)가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주요 공정을 관리해야 전체 공정에 필요한 소요일정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대형 프로젝트나 중소형 프로젝트도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사실 주요 공정에 수반되는 부속공정은 그렇게 조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간적으로 약간의 여유가 있을 뿐 아니라 전체 공사일정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주공정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만 관리를 해 주면 그만이지요. 그래서 오히려 차근차근 주어진 시방서에 의해 부속공정을 관리하면 공사의 품질은 더 높아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신호등 앞에 다음 신호를 기다리지 못하는 조급함이 공사의 품질을 낮추고, 보다 훌륭한 대안을 찾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조급함도 있지만 높은 인건비 탓인 경우도 많습니다. 몇 번에 나누어서 처리해야 할 작업을 한 번에 끝내고 마무리 짓는 경우입니다. 보통 현장에서는 바탕처리를 하고, 1차 작업, 2차 작업, 최종마무리 순으로 진행되는 공정이 많습니다. 작업과 작업사이에 서너 시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고, 하루이상의 시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지요. 건축주는 마음이 급해서 재촉하고, 시공자는 인건비 때문에 최대한 빨리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필요이상으로 그 시간을 단축시키려는 태도는 바로잡는 것이 필요합니다.


시간을 두고 덧칠하면 색이 분명해집니다. 시간을 두고 진행하면 두 번째 색상의 농도를 어느 정도로 해야 할지 가늠하기가 용이합니다.  시간차를 두면 다른 곳에 칠할 곳이 보입니다. 마음에 여유를 가지고 부지런히, 하지만 순서에 따라 하나씩, 그리다 보면 내가 그리는 그림은 점점 분명해지고 강한 색을 나타냅니다.

하나의 멋진 수채화 그림이 완성되는 것처럼
내가 짓는 집도 그렇게 만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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