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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간다는 것은 두렵고 슬픈 일입니다. ‘늙는 것이 아니라 익어간다’는 노랫말을 들으며 '그게 그 말이지!'라고 생각한다면 너무 냉혹한가요? 늙는다는 것은 익어가는 것이 아니라 ‘적응되어 가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깊게 파인 주름과 얼굴의 검버섯, 그리고 힘 없어진 머리카락은 변명의 여지없이 늙은 것이지요. 지구의 중력으로 내려 처진 살가죽을 리프팅으로 끌어올릴지라도 늙어가는 것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30대 초만 해도 동안(童顏)으로 나이에 대한 오해를 많이 받았던 터라 계속 동안일 줄 알았는데 모진 풍파(?)를 거치다 보니 이제는 동년배 나이 플러스 5년은 되어 보입니다. 외모 때문에 우울할 때도 있었지만 시간이 좀 더 흘러가니 나보다 5년 어려 보이던 동년배도 피장파장, 도찐개찐, 그 나물에 그 밥이 되어가는 것을 보며 덧없는 구름에 쓸쓸한 미소를 짓습니다. 이렇게 글을 적다 보니 인생 다 살고 가는 6.25 때 참전용사 같지만 오해하진 마세요. 아직은 젊습니다. (식은땀 -_-;;) ㅎㅎ
중학생시절부터 머리 새치가 많았던 터라 남들보다 일찍 흰머리가 되었습니다. 아내와 병원에서 함께 진료를 받고 승강기를 타고 내려오는데 젊은 엄마가 내리면서 자기 아이에게 인사를 시킵니다. “할아버지한테 인사해야지?”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펀치를 날리고 가네요. 하루종일 기분이 상하고 불쾌한 감정이 사라지 않습니다. 10여 년 전에 있었던 일로 제가 '익어가기 전'이었으니 충격이 컸습니다.
한동안 염색으로 젊게(?) 보냈지만, 주기적인 것은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닙니다. 그냥 흰머리로 내버려 둘까 하는 맘으로 몇 달 염색을 안 했더니 그런대로 봐줄 만합니다. 처음 볼 땐 나이가 있어 보이지만 몇 마디 나눠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금방 아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아내는 첫인상으로 남편과 나이차가 있어 보이는 것이 싫은지 꾸준히 제게 염색을 강요합니다. 우리 아들은 아빠가 검은 머리보다 흰머리가 잘 어울린다고 합니다.¹ 그러나 피할 수 없는 대외활동(?)으로 검은색 머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집안 행사가 있으면 버릇없이(?) 보이지 않도록 머리를 염색을 하고 어른들 앞에 나서지만, 이젠 집안 어른들도 몇 안 남으셨네요. ㅠㅠ
세월은 '화살과 같다'거나 '물 흐르듯 빠르다'는 표현으로 중국에는 세월여북(歲月如梭)이란 말이 있습니다. 세월은 마치 베틀의 '북(shuttle)'과 같이 빠르다는 뜻입니다. 쑤이위에 루~솬! 중국어 발음이 보다 사실적으로 느껴집니다. 중국어 특유의 성조(음의 높낮이)를 덧붙이면 보다 실감이 납니다. 정말 세월이 빨라 보입니다.
어느 날 아내가 주변 지인이 했던 말을 제게 전해 줍니다. "당신은 참 멋지게 늙어가는 것 같다"라고 하면서 '존경할 만'하다는 것입니다. 아내의 핸드폰에 제 이름은 '한결같이'입니다. 결혼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는 뜻으로 그렇게 부르고 있는데, 요즘은 '한결같지'않고 더 좋아졌다고 합니다. 최고의 칭찬이죠. 우리나라 모든 남편들의 공식별명으로 '밴댕이'가 있는데² 여기서 조금 탈출한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어느새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중'인가 봅니다.
우리 딸은 '높은 음자리표'입니다. 집에서 아무도 못 건드립니다. 자고 있는 아빠의 이불을 걷어 제낄 수(젖힐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딸밖에 없습니다. 아들은 '네 잎 클로버'입니다. 요즘 친구 만나러 다니느라 집에서 볼 수가 없습니다. 아내는 '샛별(계명성)'입니다. 아침마다 뭘 자꾸 깨닫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살고 싶은 거겠지요. 저는 '어린 왕자'입니다. 남의 말을 잘 안 듣습니다.³ ㅎㅎ 오늘은 지하철에서 글 쓰느라 안내방송도 안듣고 한 정거장 더 갔네요. 이거 가는지(익어가는지)도 모르고 계속 지나쳤습니다. 여러분도 '인생이란 차'를 타고 갈 때 '이거 가는지' 확인해 보세요. 나도 모르게 지나칠 수 있습니다.
주¹) TMI : 제 프로필 사진(흰머리사진)
주²) 글쓴이의 주관적 해석이므로 해당없으신 분은 편하게 생각해주세요.
주³) 「어린왕자」를 좋아하는 독자로서 개그적 표현이므로 양해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