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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엔디 Aug 19. 2024

지혜야! 언니가 옷 개 줄까?

인생그래프의 추이를 바라보며

  "12에 3이 몇 개가 들어가?" 큰 누나가 나눗셈을 알려줍니다. 어렸을 때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숫자에 어떻게 숫자가 들어갈 수 있냐는 겁니다. '12에서 3은 뺄 수가 있겠는데 같은 숫자끼리 그 속으로 어떻게 들어간다는 거지?'  곱셈의 교환법칙을 설명하는 도식이 산수책 첫 장에 나옵니다. '○×□= □×○' 하~ 정말 미치겠습니다. '숫자는 곱할 수가 있는데 도형을 어떻게 곱하라는 건지......' 산수는 정말 어렵습니다.


  4살짜리 「지혜」라는 아이가 하얀 비닐봉지에 자기 옷을 담아 들고 다닙니다. 이것을 본 5살짜리 「하얀」이가 「지혜」에게 말을 건넵니다.

"지혜야! 언니가 옷 개 줄까?"

"시어...! 엄마한테 혼나....."

"지혜야! 언니가 옷~ 개 줄게~!"

"시어~! 엄마한테 혼나~!"

  「지혜」는 계속 싫다고 우겨댑니다. 왜 지혜는 ‘옷을 개 준다’는데 싫다고 할까요?


   「지혜」는 ‘옷을 개 준다’는 말을 멍멍이 개한테 자기 옷을 준다고 알아들었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어휘를 몰랐던 겁니다. 아직 단어에 대한 개념이 서 있지가 않습니다. 답답한 「하얀」이가 「지혜」에게 설명을 해 줍니다.

“지혜야! 옷을 개 주는 게 뭐냐면..... 옷을~ 개! 준다고!!!”

   「하얀」이도 나름대로 설명을 해 주려고 애를 썼지만 그 이상의 새로운 단어를 찾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물론 「지혜」는 계속해서 싫다고 우겨댑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도 이와 같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천국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예수님은 여러 비유를 통하여 천국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말씀하신 비유를 제자들에게 풀어서 설명(마 10:37-43) 해 주었지만 아마 천국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100% 이해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 천국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갖지 못하였고 더군다나 천국을 가 본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천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험이라는 학습이 필요합니다. 마치 「지혜」가 '옷을 개 준다'는 의미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학습과 경험이 요구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우리는 천국을 경험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보지 못한 천국을 이해하고, 보지 못한 예수님을 믿을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믿음으로 가보지 못한 천국을,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예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막연한 추측이나 확신이 아닙니다. 믿음은 거울에 비친 허상(虛像)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증거'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갓난아이가 말을 배우기 전에 '옹아리'라는 것을 합니다. 당장 의사소통은 안되지만 아이는 엄마에게 끊임없이 ‘옹아리’를 합니다. 결국 아이가 성장하면서 ‘말’을 배우게 되고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대화하며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시키며 새로운 것들을 알게 합니다. 마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옹아리'를 하며 그분의 사랑을 매일 체험하는지도 모릅니다.  끊임없는 '옹아리' '의사소통'의 길을 열어 주었듯이 우리는 끊임없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분량을 키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결국 그 '믿음'은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적으로 알게 하며 그 분과의 인격적인 만남의 길을 열어 줄 것입니다.




......라고,


  교회에서 '새 가족 공부' 교안을 만들어서 침을 튀겨가며(?)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이 마약과 같아서 강사가 되는 순간 나는 '전지전능'한 절대자가 됩니다. 물론 확신 없는 것을 가르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강의내용이 오히려 나를 강제하고 포장하며 스스로에게 최면이 걸리게 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믿음'을 이야기하고, '기도생활'을 이야기하고 '인격적인 만남'을 이야기했지만 사실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가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릅니다. 뼈를 깎는 아픔뒤에 하나를 깨닫고, 수십 번의 눈물을 흘려야 진실된 기도 한마디 할 수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낮아짐'이란 책이 출간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더 낮아짐'이란 책이 나오는 것을 보며 '도대체 어디까지 내려가야 하는가'하는 자조(自嘲)적인 태도를 보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굴곡진 우리네 인생에서 하나님이 만들어가시는 인생그래프의 추이를 지켜보고 끝까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린도후서 3장 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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