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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엔디 Jul 04. 2024

버려야 하는 것들

  6살 된 천재소녀 상롱(尚荣)이 TV에 출연해서 사회자와 대담을 이어가는 영상을 즐겨찾기 해 놓고 몇 년간 수십 번을 보았습니다. 사서삼경을 줄줄이 외우고, 황제내경을 해석하고, 시경의 시구(詩句)를 운율에 맞춰 읊을 뿐 아니라 즉흥적으로 자작 시까지 지어냅니다. 사회자가 “도대체 이걸 누가 알려줬냐? “라고 하자, 엄마 아빠가 알려줬고, 지금 알고 있는 한자(汉字) 수가 대략 3-4천 자 정도라고 답을 합니다. 다른 남자 사회자는 "듣고 보니, 나는 지금까지 헛살았다(白活了)!”라고 탄식을 합니다.  학습의욕이 뿜뿜 생기는 영상입니다.


  몇 년 전에 삼국지 “사마의 1, 미완의 책사”, “사마의 2, 최후의 승자”라는 드라마(중드)에 푹 빠져 전편을 다 시청한 적이 있습니다. 조조(曹操)와 제갈량(诸葛亮), 사마의(司马懿) 간의 치열한 머리싸움과 그 사이에 오고 가는 서찰들이 대나무로 만든 죽간(竹簡)으로 오고 가며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흥미를 끄는 장면 중의 하나는 화가 날 때 배우가 죽간을 바닥에 던지기도 하고, 눈물을 머금고 편지를 쓸 때는 붓을 들고 죽간을 촤르르륵 펼쳐놓고 한 글자씩 써 내려가는 품격(?)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존에서 죽간으로 만들어진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를 구매했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배송된 포장지를 뜯는 저를 바라보는 아내가 쇼핑을 안 하는 사람이 이렇게 기뻐하는 모습은 처음이라며 어이없어하기도 했습니다.


  고전을 현대어로 해석하고, 문장을 익히는 것도 나름 재미가 있습니다. 한동안 제갈량의 출사표 원문을 현대중국어로 해석해 놓은 자료를 다운로드하여 시간 날 때마다 들여다본 적이 있습니다. <오십에 읽는 논어 ; 최종엽>를 선물 받고 그냥 편하게 읽으면 될 것을 굳이 본문에 나오는 논어 원문을  해석한다고 아직도 책을 삼분의 일도 못 읽었으니 저는 왜 이리 힘들게 사는 걸까요?


 당나라 말 황소가 난을 일으켰을 때 최치원이 토황소격문(討黃巢 檄文;역적 황소에게 보내는 격문)을 보내서 적장의 죄를 꾸짖고 힐책할 때 그 화려한 문체와 위엄에 놀라 황소가 혼비백산하여 자기도 모르게 상에서 굴러 떨어졌다는 일화가 있죠. ‘아니 어떤 문장이었길래…’ 하면서  굳이 인터넷으로 원문을 다운로드하여 해석본을 옆에 놓고 비교해 보기도 합니다. 도대체 나란 사람은 왜 그럴까요?


  지적이지 못한 사람이, 지적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 욕망이 저한테 있습니다. 역량도 안되면서 따라잡으려고 합니다. 생각이나 마음이 날카롭고 조급해지고, 마음엔 시(詩)를 담을 수 있는 여유가 없습니다. 스웨덴 배우 “잉거 닐슨” 주연의 <말괄량이 삐삐>에서 친구가 삐삐에게 묻습니다. “삐삐야! 네 신발은 왜 이렇게 커?”, “나는 신발 속에서 발가락이 움직이는 것이 좋아!”라고 이야기합니다. 지적욕망에 있어서는 발가락을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제게 없어 보입니다.


  교회 집사님과 대화 중에 그분은 "내가 정말 사도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길 수 있는 마음을 갖고 싶다"라고 고백하는 모습을 보며, 나에게 있어서도 지식에 대한 열망과 집착을 조금은 내려놓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빌립보서 3장 7-8절)

  버려야 할 것과 버리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고민은 쓰레기 분리수거장에서만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래도 내가 산 죽간(竹簡)은 안 버릴 겁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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