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관성 높은 건축
'아래아한글'이 개발되고 일반인에게 무료로 공개될 때만 해도 문서 작성으로는 ‘한/글’이 독보적인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세계적인 기업 마이크로 소프트사의 워드(word)도 비교가 될 수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DOS라는 운영체제 안에서 한글의 독특한 조합방식을 직관적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 가장 높이 평가될 부분이라고 여겨집니다. 당시 웬만한 프로그램들은 오퍼레이팅을 위한 '매뉴얼'을 익혀야만 그것을 운용할 수 있었습니다. 아래아 한글은 매뉴얼 없이도 몇 번의 연습만으로 간단히 서류를 작성할 수 있었으니 '직관성'면에서는 최고의 프로그램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기업별로 사내 인트라넷이 한동안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사내 정보망을 자체적으로 개발해서 폐쇄적인 네트워킹을 구성하는 것이었죠. 어느덧 우리는 빅데이터가 어떻고 알고리즘이 어떻고 하는 자동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우연한 기회에 개발하고 있는 프로그램을 운용해 보면서 의견을 제시하는 테스팅 업무를 맡은 적이 있습니다. "조작하는데 직관성이 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매뉴얼을 보지 않고도 실행할 수 있는...." 이렇게 의견 제시를 했더니 개발자는,
"매뉴얼 없는 프로그램이 어디 있어요?"
"......"
“제가 어려운 거 물어보는 게 아닙니다. 블랙리스트가 존재합니까 안 합니까?"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당시 조윤선장관 청문회 때 검사출신 이용주의원의 질문입니다. 5분간 17차례에 걸쳐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집요하게 추궁한 결과, 결국 장관으로부터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인정하고 사과를 받아냈습니다. 우리나라 현대 정치사의 비극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려운 거 물어보는 게 아니다'라는 것은 직관적으로 답할 수 있는 간단한 거라는 것이죠.
위키백과에서는 직관적이라는 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직관(直觀, 영어: intuition)은 감성적인 지각처럼 추리, 연상, 판단 등의 사유 과정을 거치지 않고, 즉 어떻게 지식이 취득되는가를 이해하지 않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화재가 났을 때 사람은 본능적으로 문을 밀고 탈출합니다. 당기는 문 앞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연기에 질식해서 사망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잘 알고 있는 사실이죠. 그래서 건축계획 시 탈출방향으로 문이 열리도록 만들거나 안내 유도등이 직관적으로 식별될 수 있는 위치에 배치를 하는 것입니다. 다중이용건축물에서는 위기상황에서 쉽게 탈출할 수 있도록 밀기만 해도 문이 열리는 패닉바(Panic Exit Device)를 설치하기도 합니다.
직관성은 익숙해진 행동 패턴에 의해 규정될 수 있습니다. 외국여행 가면 그 나라의 행태와 습관, 생활양식이 틀리기 때문에 직관성이 현저하게 떨어지게 됩니다. 당연히 어떤 일에 우왕좌왕하거나 당황스러운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고양이와 개가 앙숙인 것은 의사소통의 신호체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죠? 대형 쇼핑몰은 요즘 자동문인 경우가 많아서 다가가기만 해도 자동으로 문이 열립니다. 자동문이 아닌 경우 문이 열릴 때까지 그 앞에서 묵념(?)하고 서 있는 경우도 가끔씩 보게 되는 해프닝입니다. 예전엔 자동차 유리가 수동식으로 핸들을 돌려서 여는 타입이었습니다. 신형차는 버튼을 눌러서 자동으로 열리는 구조인지라 같이 차를 타고 가던 한 지인이 뒷좌석 앉아서 "창문 좀 열어주세요!" 하길래 "돌려주시면 됩니다." 말하고, 서로 한바탕 웃었던 일이 있습니다.
예술적인 평면을 만든다고 일반화되지 않은 계획을 할 때가 있습니다. 평면을 뒤틀고, 높이를 변경하고, 일반적이지 않은 특별함을 내세우고 싶은 욕망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평범한 것이 가장 훌륭한 건축일 수도 있습니다. 단순한 것이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직관성을 높일 수 있는 소프트웨어가 대중화될 가능성이 높은 것처럼, 가장 쉽게 접근하고, 가장 쉽게 찾아내며, 가장 탈출하기 편한 건물이 가장 좋은 건축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직관성을 높일 수 있는.
대문사진 출처 : 픽스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