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향(殘香)과 잔향(殘響)
강아지는 주인이 집에 돌아오는 시간을 체취(體臭)로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집에 남아있는 주인의 잔향(殘香)을 계산해서 본능적으로 귀가시간을 예측한다는 것입니다. 동물의 세계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긴 계절이 변하고 찬바람이 불기 전에 따뜻한 남쪽을 향해 편대를 이루어 날아가는 철새는 안 신기할까요?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잠언 6장 7-8절)'는 말씀처럼 이 세상을 들여다면 볼수록 신묘막측(神妙莫測)할 따름입니다.
강당이나 공연장 그리고 콘서트홀 등을 건축할 때는 음향(音響) 설계가 중요합니다. 잔향시간은 공간의 음환경을 조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울림이 심하거나 메아리가 치는 잔향(殘響) 시간이 길어지면 음(音)이 지저분하고 명료도(明瞭度)가 떨어집니다. 반대로 잔향시간이 짧아지면 명료도는 높아지지만 음악적으로는 건조하고 딱딱한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잔향시간 (reverberation time)은 초기음이 60dB로 감소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말합니다. 참고로, 보스턴 심포니홀의 잔향시간이 1.7초, 워싱턴 케네디센터가 1.9초,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이 2.6초라고 합니다.
공연장이나 콘서트홀의 경우 실수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공사 전 설계단계에서 시뮬레이션을 통해 공간의 최적화된 음환경을 예측합니다. 실내구성요소에 따라 음환경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음의 확산이나 반사 그리고 잔향시간을 종합적으로 검토합니다. 결과에 따라 마감재료를 변경하기도 하고, 구조를 덧붙이거나 비율을 조정하기도 합니다.
어떤 건물의 공간 음향 시뮬레이션을 진행한 결과 중저음이 반사를 일으킨다는 사실에 벽체구성(유공판+부직포+흡음뿜칠)을 설계에 반영한 적이 있습니다. 문제의 중저음을 벽 뒤로 갇히게 해서 잔향을 일으키지 않도록 한 것이지요. 계획은 좋았으나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최종마감에서 부직포에 흡음뿜칠이 박리되는 현상 탓에 현장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러나 역시 빠져나갈 방법은 있기 마련인지라 음을 투과시킬 수 있는 마감재를 다른 것으로 변경하면서 일단락되었던 일도 있었습니다.
잔향(殘香)과 잔향(殘響)! 두 단어 모두 남긴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는 향(香)을 남기고, 다른 하나는 음(音)을 남깁니다. 줄어드는 주인의 체취를 못내 아쉬워하며 외로움에 하루를 보내다가 마지막 한 푼 향을 남겨두고 꼬리를 흔드는 환희의 잔향이 그 향(香)이며, 작가 한강이 노래를 듣다가 눈물을 흘렸다는 '악뮤'의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라는 사무치도록 남아있는 사랑이 그 향(響)인 것이죠. 남겨짐의 애절함이 있기에 잔향(殘香)이나 잔향(殘響)이나 우리를 아름답게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문사진 출처 : 프리픽 AI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