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버리기 전에
비호(飛虎)라는 이름이 참 멋집니다. 다섯 살 때 친구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그 이름의 뜻이 '날 비(飛), 호랑이 호(虎)'라는 것은 쉽게 추론이 가능하죠. 저는 어릴 때 기억을 좀 많이 하는 편입니다. 입고 있던 흰색 난닝구 (러닝셔츠) 그림, 아버지가 그물로 참새를 잡는 장면, 장마철 비에 불어있는 개울을 엄마등에 업혀 건너가다 모자가 떨어졌던 기억이 3살 때였고, 4살 때는 건넌방에 있었던 누에, 도깨비 약국의 하늘색 벽면 이렇게 2가지 기억이 있습니다. 5살 때부터는 부분적인 기억이 아니라 어제 일처럼 이야기를 엮어낼 수 있으니 내 자아(自我)가 형성되었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로버트 풀검의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란 책이 출간되었을 때, '맞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라고 설레는 마음으로 책을 구매해서 읽었습니다. 기대감은 컸지만 우리와 문화적 정서도 틀리고 번역본이라는 한계 때문인지 사실 큰 공감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비호'는 길 맞은편 좀 떨어진 곳에 사는 여인숙집 아들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숫기가 없어서 부끄러움도 많이 탔습니다. 여느 아이들처럼 밖에 나가 거칠게 노는 성격이 아니다 보니 가깝게 지내는 친구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비호'라는 친구도 나 같은 부류의 성격인지라 부모님끼리 의기투합하여 나와 비호를 친구로 엮어 주었습니다. 골목길에서 세발자전거를 같이 타기도 했고, 복도 양쪽으로 방들이 주욱 들어서있는 그 아이 집(여인숙)도 구경했습니다. 요즘은 상상할 수도 없겠지만 예전엔 그렇게 어린 친구들이 혼자 밖에서 많이 놀았습니다. ㅎㅎ
왜 그런 거 있지 않나요? 갑자기 놀던 친구가 싫어질 때 말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비호가 나랑 놀자고 찾아오는 것이 싫어집니다. 요즘말로 누구랑 같이 한다는 것이 성격상 에너지를 빼앗긴다는 느낌이 있었나 봅니다. 구멍가게를 하던 우리 집에 비호가 또 오는 것이 먼발치에서 보입니다. 바로 위에 누나에게 "나 쟤랑 안 놀아!" 하면서 집 안으로 들어와 숨었습니다. 누나는 남동생을 쉴드 치며 제가 없다고 내보내기를 몇 번 했습니다. 어느 날은 눈치를 챘는지 막무가내로 방문을 열어서 들어오려고 합니다. 나와 누나는 필사적으로 방문을 걸어 잠그고 못 들어오게 막습니다. 결국 대성통곡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간 것이 '비호'와의 마지막 작별이 되었습니다. 기억 속에 '비호'라는 이름을 남긴 채.... 아~ 지금생각해 보면 '나는(飛) 호랑이'가 아니라 '비호(悲虎)', '슬픈(悲) 호랑이' 였네요.
거절(拒絶)한다는 것처럼 매정한 것은 없습니다.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사춘기 때 부모님을 가장 가슴 아프게 하는 말이 '엄마! 상관하지 마!'가 아닐까요? 성경에 나오는 귀신은 예수님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과 상관이 없다는 것을 귀신도 알고 있습니다. 반면에 빌레몬서에서 바울은 당시 노예였다가 도망친 오네시모를 주안에서 받아들이라는 편지를 쓰면서 종과 같이 대하지 말고 종 이상으로 사랑받는 형제로 삼으라는 권면을 하면서 특별히 빌레몬에게 '육신과 주안에서 상관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것이 우리네 삶입니다. 기분이 상하고 마음이 불편할 때도 많습니다. 냉정하게 생각해도 내가 옳다고 여길 때도 있고, 고개를 못 들을 정도로 송구한 일도 경험하게 됩니다. '에잇, 잊고 끊어버려야지!'하고 관계의 단절을 선언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끝까지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볼 때 분명 옳지 않은 방법 같습니다. '슬픈 호랑이(悲虎)'를 옆에 두는 것보다 '날아가는 호랑이(飛虎)'를 곁에 두고자 하는 마음이 제게 더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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