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생은 내가 선택한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한 장면이 있다. 제주로 이사 오기 전, 잔금을 치르기 위해 지인과 함께 제주도에 내려왔다. 이미 퇴사를 한 상태였고 내 생에 첫 자유의 몸이 되었던 그때이다. 집 마당에 앉아 멀리 내다보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기쁨의 순간을 맞이하던 때이다. 그때의 순간만큼은 행복이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영원한 행복은 없다. 우리가 즐거운 건 그저 그 한순간일 뿐이다. 원하는 걸 얻었다면 반드시 대가는 치러야 하는 법. 제주에 오기까지의 과정은 쉽지 않았다. 40대 초반, 회사생활이 무르익을 즈음 퇴사를 결정한다는 것은 쉽게 내릴 수 없는 나이이다. 그래서 어쩌면 매일매일 제주로 내려가 사는 꿈을 종이에 그리며 소원을 빌었는지 모른다.
주위 시선은 온통 부러움뿐이었다. 제주에서의 삶은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로망이었기 때문이다. 함부로 꿈꾸기엔 너무도 크나큰 도박과도 같다. 지금 생각해도 난 도박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이기거나 지거나 둘 중 하나다. 이기면 욕심내서 더하게 되고 잃게 되면 본전이 생각나서 멈추지 못한다. 그러한 날들을 나는 벌써 겪고도 아직 진행 중이다. 도박과도 같은 제주의 삶에서 아직 끝내지 못하고 한 판을 더 기다리는 중이다.
제주에 오기만 했을 뿐. 아는 것이라고 하나도 없었으니, 그렇다고 걱정되는 일 또한 없었다. 그렇게 그냥 충만한 기쁨만으로 제주의 삶은 시작됐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그날, 그 해 4월 16일. 오래 몸담고 있었던 회사의 입사 날짜다. 난 그날을 생일 다음으로 기념일로 삼았고 매년 4월 16일이면 직장 동료들과 함께 파티를 열곤 했다. 퇴사 날짜도 맞추고 싶었지만 급여와 연차휴가 등을 고려해 퇴사일을 6월 1일로 맞추었고 제주로 이사 날짜를 맞춘 건 4월 30일이었다. 우리가 제주로 가기 위해 예약한 배는 영원히 탈 수 없는 세월호였다.
2014년 4월 16일, 그날도 우린 저녁모임을 만들었고 서울에서의 마지막 송별의 저녁이었다. 출근을 하고 모니터를 켜고 뉴스를 보는데 배가 침몰하는 장면이었다. 그때만 해도 사람들은 그 소식에 그렇게 놀라지 않았었다. 당연히 그 큰 여객선이 침몰할 정도에 이르렀으면 벌써 사람들을 다 구출하지 않았을까 하는 안도감이었을까. 수군거리는 직원들의 반응도 없었다. 하지만 뉴스는 전혀 다른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고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 일로 인해 제주로 오던 해는 마음이 무겁고 침울한 마음이 함께했다.
제주에서 내가 원했던 집은 넓은 땅과 집이 함께 있는 집이었다. 그런 집을 찾기 위해 2년간 제주를 다니며 부동산을 기웃거렸고 결국 원하던 집이 한눈에 반해 그 집을 계약하고 돌아와 다음날 퇴사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그 집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쉽게 퇴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800여 평의 땅을 가지고 있고 집이 세 채가 있었다. 800평은 대지 1000평은 밭으로 구성된 땅으로 두 개의 구옥은 제주의 돌집으로 원하던 스타일이었고 메인으로 지어진 큰 집은 절에서나 볼 법 듯한 집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스님이셨던 분이 지었다고 들었다. 예스러운 구조의 집이 마음에 들었다. 아직도 내 소원은 사찰 분위기의 텅 빈 방 하나를 갖는 것이다.
땅도 넓고 집도 세 채나 있으니 매매가는 꽤 높았다. 하지만 돈이라는 것은 어떻게는 만들어진다. 대출도 대출이지만 대출을 최대치 해도 모자라는 금액이었다. 그래도 계약은 했고 그 집에 꽂혀서 어떻게 해서든 돈을 마련해야 했다. 그렇게 간절함으로 돈을 찾아 나서면 돈은 구해지게 된다. 하지만 그 빚이 나에게 어떤 시련을 주는지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여기저기 끌어당겨서 다행히 내 손에 집문서를 득하게 되었다.
제주로 내려갈 때 혼자 간 것이 아니다. 결혼 3년 차였던 나는 전 남편과 그의 아들(중2), 그리고 전 시어머니. 이렇게 네 식구가 모두 내려오게 되었고 직장을 그만두지 않은 전 남편은 회사 근처에 집을 따로 얻어 살았고 세 식구만 제주로 내려왔다. 돌이켜 보면 그 시작이 이미 불길한 결말의 첫 단계가 아니었나 싶다. 제주에서의 모든 일은 내가 모두 도맡아서 해야 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반려견 네 마리가 함께했다. 셔틀랜드 쉽독, 레트리버 래브라도 2마리. 그레이하운드. 대형견을 키우는 게 쉽지 않다는 것 또한 몰랐다. 그럼에도 반려견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고 대형견 사랑에 빠진 전 남편은 캉갈, 불리쿠타 같은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견들을 하나둘씩 집에 들여오기 시작했다. 불행의 시작을 알리는 첫 울림이 아니었나 싶다.
이 견들이 다들 어떻게 살았을까. 쉽독은 거금을 들여 새끼 분양받은 2개월 남짓된 아이로 제주로 온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진드기로 인해 병원을 잘못 찾은 탓에 안타깝게 무지개다리를 건네 보냈다. 그레이하운드는 케이지에 잠시 넣어두고 외출했는데 누군가 문을 열어주는 바람에 집을 나가 영영 찾아오지 못하게 되었고, 래브라도는 워낙 빨리 자라는 견종이라 블랙 래브라도는 다른 사람에게 보내졌다. 불과 한 달이 안된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래브라도 한 마리 잘 키우던 중에 불리쿠타라는 악마견이 집에 오게 됐는데 새끼 때는 견종 불문하고 다 예쁘다. 그리고 후에 캉갈이 오게 됐고 대형견을 가 둘 펜스를 쳐야 할 만큼 커졌고 이들을 혼자 감당하기엔 내가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아침마다 중2 학교 등교시켜야 했고 밥하고 청소 빨래는 모두 나의 몫이었다. 그래도 한편에 나의 기쁨이 있었으니 제주의 생활은 즐거움의 연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