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다르지만 나와 같다
<명랑한 은둔자>_ 캐럴라인 냅
나와 다르지만 나와 같다
젊고 예쁘고 재능 있는 작가. 이 정도면 요즘 말로 ‘인싸’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인기를 누리며 활발하게 사교활동을 할 것 같다. 그러나 캐럴라인 냅은 자신이 “설령 자신감 있고 사교적이고 외향적인 사람이 되기를 바라더라도 성격의 신들이 조용하고 내성적인 사람으로 만들기로 결정”했으므로 평생 수줍음과 함께 살아왔노라고 고백한다. 그리하여 타인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고 원치 않는 오해도 받았다고. 수줍음은 무례함으로, 조용한 삶은 공허한 삶이라고 여겨지고, 사적인 공간과 시간을 원했을 뿐인데 고립이 되어 버린다고.
캐럴라인 냅은 미국의 작가이다. 기자와 칼럼니스트로 여러 잡지에 글을 실었다. 자신의 내밀한 삶을 지적이고 문학적인 문장들로 고백해서 세간을 놀라게 했고 인문학, 심리학, 사회학적으로도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은 알코올 중독에 빠졌다가 헤어 나온 경험을 담았고 <욕구들>은 극심한 거식증의 경험을, 《개와 나》는 자신의 반려견을 향한 지나친 애착을 담았다. 모두 미국에서 베스트셀러였다. 번역자인 김명남은 ‘옮긴이의 말’에서 캐럴라인 냅의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을 읽고 자신이 바뀌었다고, 알코올을 끊을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냅은 2002년 42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명랑한 은둔자》는 앞의 책들과 다른 책들에 실린 그의 에세이들 중 일부를 모아놓은 유고집이다.
작가는 자신의 사적인 삶을 솔직하고 담대하게 고백하는데 예리하고 명료한 심리 분석과 지적인 사유가 곁들여진다. 딸, 여성, 여성 작가로 혼자 사는 삶. 자신의 성격으로 인한 고립과 고독. 가족, 친구, 반려견과의 관계에서 겪은 심리적 갈등과 무한한 애정. 불안, 슬픔, 자의식 등 삶의 압박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술에 의존하고, 자신을 통제하려고 음식을 거부하다가 극심한 중독에 빠졌지만, 어떻게 헤어 나왔는지, 그 과정에서 심리적 굴레에서 해방되고 성숙한 인간으로 변화하는 것까지 보여준다.
작가는 수많은 주옥같은 문장들에서 인간의 꺼풀 속 심리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준다.
“우리는 각자의 부모에 대해서 오랫동안 남몰래 화낸다.... 이 괴로움을 놓아버리는 일은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고 자기 인식과 성숙함과 시간이 절묘한 비율로 섞여야 가능한 일이다.”(192쪽)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아도 부모에게 애정뿐만 아니라 원망도 가지고 있다. 후자가 더 큰 사람들도 많고 그런 감정을 스스로 괴로워한다. 그들에게는 작가의 말이 가슴 깊이 닿을 것이고 위로가 될 것이다.
“중독은 우리를 보호해 줄지 몰라도 성장을 저지한다. 사람을 한창 더 성숙시키는 인생의 여러 두려운 경험들을 우리가 온전히 겪지 못하도록 막는다. 중독을 포기하면, 그래서 그런 힘든 순간들을 온전히 겪기 시작하면, 우리는 자신이 갖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근육들을 구부리게 된다. 자라게 된다.”(224쪽) 알코올이든, 니코틴이든, 무엇이든 중독의 결정적인 폐해, 즉 우리의 성장을 막는다는 점을 근육에 빗대어 알려준다.
작가의 유머가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노골적으로 나태하게 굴어도 성공할 수 있는 영역이 한 군데 있다. 감정과 격정과 분노를 수시로 터뜨릴 수 있는 영역이 미국에도 한 군데 있다,... 그러니까 이게 답인지도 모르겠다. 나도 정치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254쪽) 하하. 미국이나 한국이나 똑같다.
많은 문장들에 공감하고 위로를 얻으면서 작가가 그렇게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안타깝다. 40대의, 50대의, 그 이후까지도 작가의 문장들은 독자들에게 깨달음과 위로를 주었을 텐데. 그녀의 수줍음과 자의식으로 빚어지는 관계는 그녀만의 것이겠으나 그녀가 보여주는 통찰력은 세상의 것이어서, 공감과 친밀감마저 느껴진다. 나와 다르지만 같다는 안도와 위로를 얻으면서 인간 심리의 개별성과 더불어 보편성을 깨닫게 된다. 캐럴라인은 고독과 고립의 경계를 지키며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명랑한 운둔자였다. 점점 더 개인화되어 가는 현대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자질이 아닐까. 혼자 고독을 즐기면서도 고립되지는 않고 명랑한 삶을 즐길 수 있기를 바라는 독자들에게 이 책이 길동무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