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장 클럽에서 만나요 #14
절대 권력자이자 만능 해결사인 사장님.
아니,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이 헬스장에 모여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광신도처럼, 사장님만 등장하면 자신의 바람이 금 나와라 뚝딱 도깨비방망이처럼 이루어지리라 굳게 믿는 사람이 있다. 이번 편에서는 사장팔이 회원님을 소개하고자 한다.
내가 일한 헬스장에서는 개인 사물함 임대료가 월 1만 원이었다. 회원권을 모종의 이유로 정지시키게 된다면 락카 또한 자동으로 정지되는 시스템은 아니었다. 운동을 나오지 않는 날에도 사물함에는 짐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사용 중인 것으로 간주하여 정지한 일수만큼 차감하는 식이었다. 업장 입장에 서서 일하고 있는 근무자로서 한마디 거들자면, 꽤나 타당성 있는 논리라 생각한다. 대여해 줄 수 있는 사물함의 개수는 한정적이고 남의 짐을 공짜로 맡아주기에는 헬스장은 자선 기부 단체가 아니다.
정지하는 동안 빠져나가는 일수에 돈이 아깝다면 개인 사물함에서 짐을 빼가면 그만이다. 그리고 그 짐은 다시 운동하러 나올 때 챙겨 와서 사용하면 되는 일이다. 나는 초반에 이 간단하고도 당연한 사실을 두고 왜 사람들이 고집스럽게 짐을 두고 떠나는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짐을 빼가지 않는 이유가 따로 존재했다.
그건 바로, 사물함 위치가 너무 좋아서다.
특히 탈의실 입구 바로 마주편에 위치한 사물함은 짐을 넣고 빼기 안성맞춤이다.
규모가 컸던 헬스장인 만큼, 어떤 사물함들은 복도 중간문을 열고 나가 창고와 가깝게 놓여있기도 했다. 씻고 나와 뽀송뽀송한 상태에서 에어컨 바람조차 닿지 않는 중간문 너머로 까지 짐을 가지러 오고 가고 하기 귀찮을 법하다.
이런 불편함을 호소하며 사물함 위치를 바꿔달라는 요청도 심심찮게 들어온다. 뒤쪽까지 가서 짐을 넣었다 빼야 하는 귀찮은 마음은 충분히 공감되지만, 일일이 들어줄 수 있는 형편도 아니다. 좋은 자리의 사물함들은 이미 이용자들로 가득 차 있고 그들이 자발적으로 자리를 양보해주지 않는 한, 직원들이 무슨 권한으로 자리를 옮겨줄 수 있겠는가. 그냥, 먼저 등록한 사람이 운 좋게 먼저 차지했던 것뿐이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영역이 명백히 아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사물함 위치와 잠금 열쇠의 비밀번호를 알려주는 것이 전부다. (아, 친절한 안내는 덤이다.) 그리고 나는 아무리 서비스 직종에 몸 담그고 있다 하더라도, 친절도 사람을 봐가면서 적당히 베풀어야 한다는 걸 이날 몸소 깨달았다.
붉은기가 도는 갈색 머리를 짧게 파마를 해서 올린 머리를 한 회원님이 도도하게 걸어 들어왔다. 햇볕 반사용도로 달린 반짝이는 비즈 같은 장신구가 달린 양산마저 주인을 닮아 블랙색상 특유의 도도한 자태를 내뿜었다. 그녀는 자연스레 상담석에 털썩 앉아서는 당분간 헬스장에 못 나올 것 같으니 처리 좀 해달라는 요청을 하셨다.
"지금 개인 사물함을 이용 중이신 걸로 확인되었는데, 회원권 정지하시는 동안 짐을 빼주셔야 사물함 이용일수가 차감이 안 되세요."
"그럼, 나보고 지금 짐 빼라는 얘기야?"
"짐을 계속 보관하고 싶으시면, 저희가 만 원을 선불로 결제받고 있어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헬스장 운영 규정이 이러하다. 양도비 일도 마찬가지였지만, 만 원을 더 받고 말고는 내가 정한 규칙이 아니다. 나는 그저 원칙대로 성실히 일하고 있는 직원일 뿐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 만 원이 사람 눈 돌아가게 만드는 액수다.
"아니, 그딴 게 어딨어? 내가 잠깐 해외에 다녀오느라 운동 못 나온다는데, 그걸 왜 만 원을 받아?"
... 나는 독자 여러분에게 설명했던 이야기를 회원님한테도 고스란히 똑같이 읊어주는 방도밖에 없었다. '왜' 만 원을 지금 이 자리에서 '미리' 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하시니, 우선 만 원을 결제받는 이유에 대해 설명을 하는 게 나의 일이자 몫이다. 그 부분이 납득되어 선결제로 돈을 지불하든 짐을 빼든 그건 회원님의 선택에 달려있다.
"짐 빼가고서 다시 돌아오면. 쓰던 사물함 번호 다시 줄 수 있는 거고?"
아. 그건 당연히 어렵다. 내가 24시간 혼자 근무하는 경우라면, 해당 번호를 찜해두었다가 나중에 다시 그 자리로 배정해 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직원들과 돌아가면서 근무하는 만큼, 그런 개개인의 부탁을 다 기록해 두었다가 들어줄 수 정도의 여유도 정신도 없다. 짐이 빠져나간 빈자리에 어느 운 좋은 신참 회원이 차지할 가능성이 크다.
만 원을 내기는 싫고 자리는 계속 보장받고 싶은 이 회원님을 어찌하면 좋을까. 어느 사물함을 사용하시느냐는 나의 질문에 그녀는 어깨만 살짝 틀어서 가리켰다. 탈의실 입구 앞인 데다가 딱 키높이에 떨어지는 아주 환상적인 위치였다. 저렇게 좋은 자리라면, 만 원을 지불하고 자리를 지키는 쪽이 현명한 선택일 테다. 다시 되풀이되는 이야기지만, 자리 때문이라면 돈을 지불하시는 편이 낫다고 안내를 했다. 같은 설명을 반복적으로 하는 내가 폭발할 것 같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상대방이 먼저 폭발했다.
버럭버럭 지르는 고함과 상대방을 허공에서 구석구석 찔러대는 삿대질은 언제나 한 세트로 진상이 되기 위한 기본 조건인가 보다. 아, 반말은 당연하게도 언제나 필수적이다. 다들 어디서 진상 급수 자격증이라고 따고 오는 건지, 모두가 일관된 언행에 감탄스러울 지경이다.
몇 번의 설득에도 불고하고, 배 째라는 듯이 지갑이 가방에서 절대 빠져나올 수 없도록 가방을 양 팔로 감싸 안은 채, 뒤로 눕다시피 등받이에 기댄 채 씩씩 대는 회원님의 태도에 나도 인내심이 바닥이 날 만큼 바닥이 났다. 헬스장 근무 이래 처음으로 내 언성이 올라갔다.
"여기 신청서에 빨간 글씨로 쓰여 있는 부분 읽어보세요. 짐을 보관할 시, 한 달 치인 만 원을 선결제로 받는다. 이 규정 누가 만든 거 같으세요? 사장님이 만드신 거예요, 사장님 본인이 직접!! 그런데 전화한다고 하면 사장님이 서비스라고 넣어드릴 거 같으세요? 게다가 저한테 지금 이렇게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시는데?"
그동안 스트레스를 야금야금 먹고 자란 울분이 터지기라도 한 걸까.
작성되다 만 신청서에 빨갛게 강조되어 있는 글자 부분을 손으로 탁탁 내려치면서 다시 잘 읽어보라고 신청서를 회원님 쪽으로 휙 돌려 밀었다.
"아, 알았어. 내면 될 거 아냐 내면. 만 원가지고 참 나."
그 만 원 가지고 계속 고집부리던 쪽이 누구였는지 자각이 덜 된 건지, 일부러 외면 중인 건 지는 모르겠으나 회원님은 한껏 누그러진 목소리로, 약간의 볼맨소리가 섞인 어투로 장지갑에서 반듯한 만 원을 한 장 꺼내 들고, 신청서에는 사인을 마저 하셨다.
잉? 이렇게 쉽게 낼 만 원이었으면, 진작에 내면 될 일이 아니었나?
머리까지 올라와 입 밖으로 터진 나의 분노가 황당함에 막혀 도로 목구멍 뒤로 넘어갔다. 어떻게 갑자기 태도가 확 바뀔 수 있는지 도무지 그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아 물음표가 얼굴을 가득 뒤덮었다.
목적대로 만 원과 사인을 받아낸 나는, 처리해 드리겠다는 말로 소란을 일단락 지었다.
회원님도 별다른 말 없이 자리를 떠났다.
데스크에 혼자 남겨진 나는 잠시 멍해졌다. 계속 공손하게 대하면서 부리는 억지를 다 받아준 나의 노력은 전혀 안 통하다가, 맞받아서 화를 내니 일이 너무나 쉽게 풀렸다. 전지전능한 사장도 다 필요 없어진 순간이었다.
그리고, 어느 트레이너님이 내게 했던 조언이 떠올랐다.
"여차하면, 참지 말고 싸워도 돼요."
싸우면 제가 질 것 같은데요, 하고 우스갯소리 정도로 듣고 넘겼던 그의 말이 사실 실제로 필요했던 대책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매니저님도 첫날 같은 말씀을 하셨다. 누군가가 막 대하면 들이박으라고.
나는 이날 이후로, 인생에서 조금 쓴 맛을 깨달았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꼭 일터가 아닐지라도 기본적으로 좋은 인간관계 유지를 위해 항상 상냥하고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었다. 그 과정에서 이용도 많이 당하고 속병이 나기도 해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며 혼자 고뇌에 빠져 살았었다.
돌이켜보면 그럴 필요가 없었었다.
서비스는 말 그대로 서비스지, 의무적으로 당연히 지급되는 사항이 아니다. 그리고 서비스를 줄지 말지를 결정하는 건 직원의 마음이고 직원은 사람이다. 사람. 감정과 생각과 마음이 있는 고지능 동물로, 아무리 근로자 입장로서 돈 받으며 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무례하게 구는 사람한테 서비스를 주고 싶은 직원이 얼마나 있을까.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는 것도 내 마음인 거다. 떡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상대에게 순순히 내놓고 싶은 떡은커녕 콩고물도 없다.
속담이 주는 교훈이 분명 있겠지만, 시대가 변했고 사람들이 변해도 너무 변했다.
웃는 얼굴에 침을 뱉었는데도 계속 웃으면, 그건 그냥 바보 이상의 바보인 셈이었다. 계속 웃는 얼굴에 침을 뱉으면, 그만한 대가가 돌아온다는 걸 보여주어야 하는 시대에 들어섰다는 사실이 쓰디쓸 뿐이다.
실제로 말도 안 되는 걸 자꾸 억지 부리며 요구할 때, 나도 내 할 말 다 하면서 성질대로 내뱉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역시,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 정답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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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런치 작가 [지친 잉어]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