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use 버튼을 누르는 법
첫 번째, 몸을 담그고, 일시정지 하다.
근 3년 만에 목욕탕에 갔다. 코로나로 인해 발길을 끊었던 탓이다. 목욕탕 예찬자인 나로서는 중간중간 찾아오는 유혹을 이기기 무척 힘들었다. 등에 때가 쌓여가는 것 같기도 하고, 시원하게 씻지 못하는 찜찜함을 안고 사는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러던 내가 드디어 목욕 가방을 쌌다. 3차 접종까지 마친 데다 이미 한차례 감염된 전력도 있는 마당에 못 갈 것이 무엇이랴 싶었다. 주에 한 번은 못 가도 달에 한 번 정도 세신을 받는 것은 괜찮을 것이라는 바람을 안고 신을 꿰어 신었다.
탕 전체를 두어 바퀴를 돌고 난 후에야 겨우 자리를 찾아 앉을 수 있었다. 북적이는 곳을 좋아하지 않는 나였지만, 이날만큼은 왠지 싫지 않았다. 표면이 까끌한 바닥을 딛는 느낌, 사방에서 울리는 목소리와 대야 부딪히는 소리, 세신사 아주머니의 마사지 소리(등에 수건을 깔고 펑펑! 소리가 나도록 두드리는 것)도 오랜만이라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전염의 시기를 무사히 지난 사람들의 안녕함이 증기로 가득 찬 이 공간에 녹아 있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수건으로 머리를 싸매고, 탕 안으로 들어갔다. 팔과 다리를 휘휘 저으며, 뜨거운 물을 몸 전체에 두르자 경직되어 있던 근육이 흐물흐물 풀어져 내렸다. ‘이거지, 이 맛이야! 피로와 긴장은 수용성이야.’ 노곤해진 얼굴로 얼음을 잔뜩 얹은 매점 커피를 쭈욱- 들이켰다. 살에 닿는 따뜻함과 내장을 파고드는 시원함이 동시에 찾아오면 보온보냉형 인간이 된다. 마치 이불을 덮은 채로 에어컨을 켜는 것과 같은 사치스러움이 물큰한 장면이다.
시력이 나쁜 나는 목욕탕에서 뵈는 것이 거의 없다. 시계도, 사람도(나체로 있으니 더 구분이 가지 않는다), 의자도 그저 뭉뚱그려 놓은 하나의 색깔 뭉치같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손과 발로 앞을 더듬어가며 조금씩 움직이는 늘보가 된다. 시각에 대한 의존도가 줄어들면, 촉각과 청각이 배로 커진다. 물에 닿는 감촉과 에코의 조화는 here and now, 현재에 대한 감각을 극대화시켜준다. 이런 감각의 증폭은 뜨거운 공기를 견디고,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한증막에서 최대치를 찍는다.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지 않고, 흐트러져 있을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내게 있어 규칙적으로 지켜야 하는 의식과도 같다. 극 N형인 나의 뇌는 쉬라는 명령에 잘 반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닦고, 밥을 먹고, 심지어 운전을 할 때조차 나의 머리는 어제의 들었던 누군가의 말을 떠올리고 내일 벌어질 미래를 예측하느라 지금 이 순간을 감지하지 못한다. 덕분에 피곤과 불안은 내 삶에 기저를 이루는 감정이 되었다.
이십대 중반이 넘어서야 생각의 꼬리를 의도적으로 잘라주어야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속한 세계와 여러 가지 사건사고, 그로 인한 타인들의 말과 행동이 시야에 들어오게 된 것도 그때쯤이다. 자의식에 갇혀있던 작은 세상이 확장되자 다양한 감정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왜?라는 물음은 혼란을 야기했고, 생각의 꼬리가 수면을 방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감정의 인과관계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책을 읽고, 대화를 하고,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며 남은 이십대를 보냈다.
때문일까 서른을 기점으로 나는 조금 담담해지고, 약간 뻔뻔해졌다. 억지로 혹은 서둘러 덤비기보다 흘러가는 것에 몸을 맡기며, 힘을 빼는 기술도 익혔다. 물론 내려놓는 마음을 가지기란 여전히 쉽지 않지만, 이십대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고, 또 편해졌다. 계획한다고, 의도한다고 내 삶이 맘대로 굴러가지 않음을 깨달은 탓이다. 대신에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에 맞게 행동하고, 대체하고, 수정하는 현실감각이 대폭 증가했다. 나를 먹이고, 재우고, 달래는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 책임감도 늘었다. 어른으로 살아간다는 건 의식주를 책임지는 일일 테니까 말이다.
묵은 각질을 벗기며 온몸 구석구석을 살펴본다. 발꿈치와 팔꿈치 허벅지 뒤쪽, 엉덩이골, 겨드랑이 등등. 남모르게 고생했을 부위의 숨은 공로를 치하하는 마음으로 문지르고, 토닥인다. 힘이 부족할 땐, 남은 커피를 마저 마시거나 족욕을 하며 숨을 고른다. 목욕용 소금을 푼 대야에 발을 담그면 발톱의 세균마저 없어지는 기분이다. 그렇게 세신을 마치고, 거품을 듬뿍 낸 바디워시로 마무리 샤워를 해주면, 3시간이 훌쩍 지나있다. 한결 개운해진 몸으로 돌아가는 길은 가볍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요즘 세대들에게는 정신력을 강요하기보다 몸과 환경을 바꾸라고 강조한다고 한다. 백번 맞는 말이다. 힘든 일을 버틸 것이 아니라 수월히 수행할 수 있도록 변화하는 것이 옳다. 고로 힘들면 잠시 쉬어 가야 한다. 어릴 때만해도 자기 극복, 자수성가 스토리가 주를 이루었는데 더 이상 스스로와 싸워 이기지 말고, 사랑하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많아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쁘게 돌아가는 삶 속에서 일시정지 버튼이 켜지는 시간, 내게 있어 세정하는 행위는 나를 사랑하는 행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