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잠잠잠잠...잠잠해지길 기다리며
생리통이 도졌다. 20년 가까이 매달 겪는 달거리건만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통증이다. 땀으로 축축해진 등짝을 일으키며, 약통을 집어 들었다. 시험기간과 주말 알바로 인해 잠 못 자고, 쉬지도 못했던지라 아무래도 이번 달은 쉬이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아 강제 휴식을 가지기로 했다.
이불을 덮고, 누워있으니 고등학교 때 생각이 났다. 여름 방학 보충수업이었던 것 같다. 그날도 어김없이 생리 둘째 날이었고, 구토와 배변으로 5번 정도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양호실은 문을 닫았기에 조퇴를 했다. 아니 조퇴를 권유받았다. 약도 못 먹고 끙끙대기만 하는 고지식한 여고생이었으므로.
버스를 기다리는데 또 구역질이 났다. 눈앞에 까만색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날은 더운데 오한이 들었다. 낯이 기억나지 않는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받았고, 앞 좌석 손잡이를 잡고 바들거리며 흔들림을 참았다. 기는 듯이 걸어서 집에 도착한 이후에야 앓는 소리를 냈다.
루틴이 있었다.
1. 자궁이 쪼그라드는 신호가 오면 재빨리 화장실을 찾는다.
2. 위 속에 든 모든 음식물을 게워내거나 장을 비운다. 3. 타이레놀을 씹어 먹는다.
4. 누울 자리를 찾는다.
5.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린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모든 순번이 다 틀렸다. 화장실은 늘 가까이 있지 않았고, 아세트아미노펜 성분은 복통을 잠재워주지 못했으며, 누울 자리는 더더욱 잘 없었다.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만이 유일한 버팀이었다. 그땐 아픈 것도, 힘든 것도 참아내는 걸 능사로 여길 때였다. 인내하는 스스로를 대견히 여기기까지 했다.
사실은 알약을 못 먹어서 그랬다. 삼키는 게 무서워서, 목에 걸릴까 봐 불안해서 나는 매달 무력했다. 타이레놀보다 탁센이 더 잘 듣는다던 약사의 충고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도 탁센은 씹어먹을 수 없는 연질캡슐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먼 길을 돌아서야 이부프로펜 성분의 약을 만났다.
"타이레놀 사 오랬잖아"
"언니! 그날엔이 훨씬 잘 들어요. 약도 더 작잖아. 내 말 한번 들어 봐. 딱! 한 번만 먹어봐"
말 한마디에 대꾸를 세 마디씩 덧붙이던 누군가가 사 온 약이었다. 앉아 있을 힘도 없던 나는 어쩔 수 없이 정말 어쩔 수 없이 그날엔 두 알을 씹어 삼켰다.
"배 안 아파"
"이게 직빵이라니까요. 진짜 말 좀 들어요."
오지게 말 안 듣는 애한테 말 안 듣는다는 소릴 듣다니.
분하지만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귀먹은 꼰대가 되었다는 사실도 말이다. 어쨌든 약효를 본 것은 사실이니까.
크기가 작으니 어쩌다 넘어가는 때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맘먹고 삼키기도 했고, 덕분에 이 정도는 삼킬 수 있게 됐다.
나도 비타민이 먹고 싶었다. 루테인, 오메가 3, 마그네슘 같은 건강보조제를 먹으면 좋을 것 같았다. 친구들도 다 챙겨 먹는다고 했고, 나도 챙겨 먹을 나이가 된 것 같았다. 동생은 이미 챙겨 먹을 나이가 지났다고 했다.
크기가 작아 보이는 종합비타민을 사다 매일 하루에 한 알씩 삼키는 연습을 했다. 따뜻한 물을 마셔보기도 하고, 빨대를 이용해보기도 하고 고개를 숙였다 젖혔다, 흔들었다, 켁켁거리는 날을 보냈다. 물로 배 채우길 여러 번, 타율이 점점 좋아졌다.
간단한 내복(內服)이 가져온 편리한 생활로 인해 약간 건강해진 기분을 느꼈다. 거창한 것 없이 예방적인 하루를 지나는 것에 만족감이 높다고나 할까. 둑이 터지기 전에 손가락으로 막아내는 묘한 승리감도 든다. 이게 다 약을 잘 먹어서 그렇다. 정말 어른스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