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건강 추구는 어떻게 공동체의 정의가 되는가
러닝 인구가 많이 늘었음을 실감한다. 한때의 유행일지 상당 기간 지속될지 모르지만, 이른 아침 강변을 달리다 보면 묘한 연대감을 느낀다. 서로 모르는 사이지만, 각자의 이유로 단잠을 유예하고 나온 사람들. 누군가는 뱃살과의 전쟁을 선포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건강검진 수치에 겁을 먹었을 것이다. 아니면 나처럼 큰 병치레 후 재활의 수단으로 러닝을 선택했거나. 처음엔 모두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운동화의 끈을 묶는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듯 개인의 ‘이기적인 선택’이 모이고 모여 ‘사회적 효용’을 향한다는 것이다.
처음 러닝을 시작하면서 "국민건강보험 재정 건전화에 기여하겠다"며 운동화를 신는 경우는 없다. 대부분 자신의 몸이 보내는 신호에 반응한 것이다. 계단을 오를 때 숨이 차거나, 예전 옷이 맞지 않거나, 좀 더 건강한 몸에 대한 욕망이었을 것이다. 정직하고 솔직한 동기이다. 그런데 거창한 명분이 아니라 구체적인 필요에서 시작한 일은 쉬이 꺾이지 않는다.
정색하고 조금 진지하게 말해보자면, 애덤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이 여기서도 작동한다. 각자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은 공공선이 만들어진다. 러너 한 명 한 명은 그저 자신의 체지방률을 낮추고 싶을 뿐이지만, 그 개인적 욕망들이 합쳐지면 국가 전체의 건강 지표가 달라진다는 이야기다. 흥미롭지 않은가.
데이터로도 입증이 되는데 러닝을 생활화한 사람은 당뇨, 고혈압, 심혈관 질환 같은 만성질환 발생률이 현저히 낮다. 이는 곧 병원 방문 횟수의 감소, 약제비 절감, 입원 일수 단축으로 이어진다. 한 사람으로 보면 작은 차이지만, 인구 단위로 보면 큰 규모다.
벤담이라면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러닝은 쾌락을 증진시키고 고통을 감소시킨다." 개인에게는 건강한 몸이 주는 활력과 자신감이라는 쾌락이, 사회에는 의료비 절감과 생산성 향상이라는 효용이 생긴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이렇듯 구체적인 모습이다. 각자가 자신의 건강을 추구한 결과, 부지불식간에 사회 전체의 효용이 커지는 것이다.
중요한 건 단순히 전체 효용의 합이 아니라, 그 이익이 누구에게 돌아가느냐는 하는 것이다. 건강보험 재정은 유한한 자원이다. 예방이 가능했던 질병으로 그 자원을 소진하는 대신, 정말 필요한 곳에 쓸 수 있다면? 희귀질환 치료제 지원을 늘릴 수 있고, 노인 장기요양 서비스를 확대할 수 있으며, 소외된 이들의 의료 접근성을 높일 수 있다.
롤스의 '차등의 원칙'이 작동하는 순간이다. 러닝을 할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건강 증진이, 결과적으로 가장 불리한 처지에 있는 이들, 치료비 걱정에 병원 문턱도 못 넘는 이들, 희귀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더 많은 자원이 배분되는 토대를 만든다. 누군가의 러닝이 다른 누군가의 생명줄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정의로운 효용'이 아닐까.
세금을 걷어 복지에 투입하는 것은, 최대 수혜자의 몫을 일부 떼어 최소 수혜자의 이익을 보장하는 것으로 차등의 원칙에 부합한다. 최대 수혜자는 그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 때문에 이익을 보았기 때문에 세금 납부는 정당하다. 그러나 늘 그들은 ‘세금을 뜯겼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한편 러닝은 누군가에게 혜택이 돌아갈 것을 생각하지 않은 채 스스로 참여하여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사회적 공익을 형성한다. 사회적 강제와 자발적 참여의 차이다.
러닝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자본’도 있다. 공원과 하천 변에 러너들이 늘어나면 그 공간이 살아난다. 새벽과 저녁, 한때 음침했던 길이 활기찬 운동 코스로 변한다. 자연스레 치안이 좋아지고, 지역 경제도 돈다. 러닝화 가게, 스포츠 용품점, 건강식 카페들이 생겨나고, 동네 마라톤 대회가 열린다.
혼자 달리던 사람들이 점차 크루를 만들고, 그 크루가 모여 지역 커뮤니티가 된다. 나이와 직업,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달린다'는 한 가지 공통점으로 연결된다. 이런 느슨하지만 따뜻한 연대가 바로 건강한 사회의 기초다. 나는 혼자 달리는 것을 편안하게 여기면서도 주로에서 러닝 크루들을 만날 때마다 묘하게 반갑다. 함께 달리든 따로 달리든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면서 거친 호흡을 교환하는 것은 연대적 행위 그 자체다.
결과적으로 러닝은 개인의 이기심이 어떻게 집단적 공익과 만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작은 증명이다. 자신을 돌보는 것이 곧 공동체를 돌보는 일이 되고, 개인의 건강 추구가 사회의 건강 증진으로 확장된다. 이보다 더 민주적인 사회적 부조 시스템이 있을까.
공익을 위해 사익을 희생하는 삶이 정의롭다는 가치관은 여전히 유효한 방향이지만, 이미 현대인들은 이러한 근대적 계몽에서 멀어지고 있다. 그 결과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것은 반대하지 않지만, 자발적 참여는 꺼리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나는 러닝을 하면서 가능성을 본다. 내 욕구에 충실한 선택이 공동체 전체에 이로울 수 있다는 것. 나를 위한 시간이 결국 우리를 위한 시간이 될 수 있다는 것 말이다.
다시 운동화 끈을 묶을 때, 조금은 당당해도 좋겠다. 그건 나를 위한 이기적 선택이지만, 동시에 가장 실천적인 시민의식이기도 하니까. 달리는 당신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더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작은 참여이다. 다 읽었으면 나가서 달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