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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Feb 15. 2020

매뉴얼과 민주주의

비상 상황에 대처하는 한국과 일본의 방식, 그 문화적 차이

'코로나 19'에 대응하는 일본의 방식이 도마 위에 올랐다. 워낙 자연재해의 경험이 많아 촘촘한 대응 체계를 자랑하던 일본이었다. 매뉴얼은 자연재해 앞에서 무력해지는 인간이 가져야 할 행동요령을 안내하여 패닉에 빠지지 않고 대처하도록 하는 힘이 있다. 실제로 일본은 삶의 모든 분야에서 이 같은 매뉴얼이 작동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명료하게 쓰인 매뉴얼은 위험을 피하는 방식을 안내하거나 서로 다른 대응이 있을 때 조정 역할을 하기도 하고 일종의 안전판 구실을 하면서 일본 사회를 지탱해 왔다. 여기까지는 매뉴얼이 갖는 순기능이다.


한편 매뉴얼에 과잉 의존하는 것은 비 예측적 상황이 벌어졌을 때, 분초를 다투는 시급한 상황에서 기민하게 현장 판단을 내려야 할 때 오히려 장애로 작용한다. 대표적인 것이 쓰나미로 인한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와 이번 코로나 19에  대한 일본의 대응이다. 쓰나미는 자연재해로 매뉴얼에 따라 움직이면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겠지만 동시에 벌어진 원전 사고는 비 예측적 상황이었다.  코로나 19 역시 현장 책임자의 기민한 상황 판단을 요구하는 비상사태라 할 수 있다. 이 경우 상부의 지침만을 기다리거나 어디엔가 있을 매뉴얼을 찾는 사이 사태는 예측 불가한 곳으로 확산하기 마련이다.


사실, 더 큰 문제는 원전사고나 코로나 19를 바라보는 평범한 일본인들의 문제 인식이다. 그들 마음속에 뿌리 깊게 붙박인 매뉴얼주의는 '매뉴얼을 따랐더라면...', '개인이 조심했더라면...'과 같이 책임을 개인에 돌림으로써  자신의 심리적 평안을 구하는 문화를 형성했다. 만약 크루즈선 사태가 한국에서 벌어졌다면 곧바로 '정부의 무능한 대처'라는 여론이 들끓었을 것이다.

한국은 일본과 달리 자연재해나 비 예측적 상황 발생을 모두 최고 지도자에게 직접 연결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역사 속에서도 가뭄, 재난, 기근, 역병  등의 발생은 모두 덕이 부족한 왕의 탓으로 돌려졌다. 메르스 유행, 세월호 참사 등은 모두 컨트롤 타워의 책임을 묻는다. 속단하기 어려우나, 이는 결과적으로 국가의 책무를 강조하여 국가적 안전망을 구축하도록 강제한다. 일본이 비상상황에서 개인의 행동요령에 중점을 두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특히 이번에 코로나 19를 통해서 드러난 양국의 대처 방식은 이러한 문화의 차이를 부각했다.

매뉴얼에 과잉 의존하는 방식은 역설적으로 비상 상황에서 개인의 고유한 판단 능력을 유실하게 만든다. 매뉴얼주의는 개인의 자율적 판단을 종종 '오류'로 판정한다. 만약 개인의 순간적 기지로 상황을 피했다고 할지라도, 매뉴얼을 충실히 따르지 않은 책임을 물을 가능성이 있다. 새로운 전자제품 작동 방식을 설명하는 매뉴얼 필요하다. 기계적 작동 원리를 따르는 것들은 완전한 예측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제작되기 때문에 매뉴얼을 따르는 것이 안전한 작동을 보장한다. 물론 자연재해나 감염병 관리도 최소한의 매뉴얼이 필요하다. 이 경우 사태를 관통하는 최소한의 공통 원리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많은 경우 공통의 원리를 넘어 개별적 작동 상황 앞에 인간을 마주 서게 한다. 이때는 개인이 발휘하는 상황 대처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매뉴얼을 따르지만, 특별한 상황에 놓인 개인의 자율적 판단을 무시하지 않아야 한다.

특별한 상황에서 개인의 판단 능력은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 여기에는 그 사회의 문화양식, 학습방식, 지도자의 자질 등이 함께 결합한다. 개인의 자율적 판단을 존중하는 사회인가, 평소 학습방식에서 실질적 자기 주도 학습을 촉진하는가, 지도자는 자신의 권한을 다른 구성원에게 충분히 이양, 위임하는가의 여부도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고 보니 이는 시민성의 함양 방식과 매우 닮아 있다. 시민성은 시민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와 시민이기 때문에 가져야 할 책임감을 모두 포함한다. 합의된 사회적 규범을 따르면서도 개인의 고유성, 타인과의 관계, 상황 대처 능력 등이 동시적으로 발현될 때 건강한 삶을 유지할 가능성을 높인다.

졸저 교육사유(2014)에서 매뉴얼을 과잉 신봉하는 문화를 꼬집은 적이 있다. 수업과 생활지도 방식을 촘촘한 매뉴얼로 이룰 수 있다면 교사의 사유는 오히려 방해물이 될 뿐이다. 교사는 매뉴얼이 아니라 그 자신 깊은 사유를 통해 전문성을 축적하는 존재라는 취지로 쓴 글이었다.

https://brunch.co.kr/@webtutor/75

 
서로 합의된 규칙을 철저히 지키고, 새로운 상황이 발생하면 그에 합당한 규칙을 만들고, 규칙에 없는 상황이 돌출할 땐 조정자의 판단을 기다리는 것은 사회의 안정성을 기하는 데 유효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는 개인 전체 속의 원자로 환원할 뿐이며, 개인이 가진 무한한 상상력에 제약을 가할 뿐이다. 엊그제도 강의 내용을 담은 PPT를 제공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한 개인의 전문성이 어찌 한낱 PPT 안에 담길 수 있을까. 표준화한 성취에 다가서고자 하는 노력은 무난한 성공을 보장할 수 있을지 몰라도 개인이 가진 특별함, 고유함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교실밖 브런치의 지난 글, 표준화 신화와 평균의 종말은 그것을 잘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https://brunch.co.kr/@webtutor/14 


표준화와 이를 촘촘하게 따르는 매뉴얼은 때로 개인들을 책임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늘 과잉 표준화와 촘촘한 규범은 개인의 자율성에 제약을 가하면서 국가주의 혹은 전체주의에 복무해 왔다. 나는 오늘 일본 사회가 가진 강한 매뉴얼주의가 오히려 비 예측적 상황에서 개인들이 판단 능력을 지속적으로 유실하는 데 일조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을 갖는다. 그동안 한일 간의 무역 분쟁, 감염병 대처 방식을 관찰하면서 느끼는 생각이다. 정부는 늘 시민의 공격 대상이 되고, 시끌벅적한 논쟁 끊이질 않으면서도 종종 국가주의적 행태를 보이는 한국 사람들이 실망스러울 때도 있지만 한편으로 묘한 자부심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야단법석을 먹고 자라는 나무와 같다.  



* 커버 이미지 https://www.newyorker.com/news/the-future-of-democracy?verso=tr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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