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체중이 많이 빠져 몸이 허하다. 그 여파로 귀까지 먹먹하다. 30년 만에 몸무게의 앞자리가 바뀌었다. 그게 착실하게 운동하고 음식을 조절한 결과가 아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한 달 전 앞니 하나가 힘없이 빠졌다. 임플란트를 해 박을 때까지 4-5개월은 이 상태로 지내야 한다. 치과에선 임시 치아를 하겠냐고 물었지만 싫다고 했다.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남들이 알아볼 일은 없다. 체중이 30년 전으로 돌아간 첫 번째 이유는 빠진 이 탓에 음식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해서다. 두 번째 이유가 있다. 몹쓸 감염병은 모든 점심과 때로 저녁까지 도시락으로 때우게 했다. 벌써 7개월째 반쯤 식은, 어떨 때는 거의 식은 도시락을 먹었다. 매일 반 이상을 먹지 못하고 남겼다. 그렇지 않아도 짧은 입에 먹는 즐거움은커녕 그야말로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 식사를 한 셈이다.
갑자기 재채기가 찾아든다. 마스크를 오래 써서 코를 비롯해 기관지와 성대까지 도무지 성한 곳이 없다. 정신없이 재채기를 하다 보니 눈물, 콧물에 방귀까지 새어 나온다. 신경질적으로 티슈를 뽑아 눈물을 찍어내고 코를 팽 풀었다. 재채기할 때 나오는 눈물은 보통 그걸로 생명을 다하는데 오늘은 달랐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른다. 그 상황이 허전하여 짜증이 났다.
종일 긴장 속에서 일을 하고, 정신을 놓으면 안 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거기다가 스스로 정한 원칙에서 이탈하지 않으려는 다짐 때문에 추가로 써야 하는 에너지가 상당하다. 모두의 삶 속엔 스스로 선택한 부분과 외부로부터 강제된 부분이 섞여 있다. 때로 원하는 일보다 안 하면 안 되는 일을 더 할 수도 있다. 따라서 "당신이 선택한 삶이잖아"라고 말하는 것은 당사자에겐 일종의 폭력이다. 우리가 타자에 대해 이해할 때, 특히 과거에 신뢰했던 관계라면 우정을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 물론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은 전적으로 맞다. 그래서 지금 맺고 있는 여러 관계들은 나에게는 혼선의 연속이다. 아마도 이런 잡스런 생각들이 재채기 후 눈물을 멈추지 않게 했을 것이다.
체중과 함께 근육까지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다. 할 수 있는 운동이 별로 없어 걷기로 했다. 사월 한 달 동안 40만 보를 넘게 걸었다. 퇴근이 아무리 늦어도 숙소 주변을 걷다가 들어갔다. 2만 보 이상을 걸은 날도 있고, 보통 1만5천 보 이상은 걸었다. 이것이 체중을 30년 전으로 돌아가게 한 세 번째 이유라고 생각한다. 과거에는 꼭 끼는 듯한 느낌의 옷들에 팔다리가 쉬이 들어간다. 그게 꼭 좋은 기분만은 아니다. 근육과 단백질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다는 그 사실 만큼 허전하고 공허하다.
어제 퇴근하고 보니 1만 보 밖에 안 되길래 늦은 밤에 호숫가로 나가 한 바퀴를 돌았다. 비가 조금 내렸다. 우산을 쓰기도 안 쓰기는 뭐한 딱 그 정도 비여서 그냥 우산을 접어서 들고 걸었다. 약한 비를 맞는 느낌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리고 오늘 아침, 몸에 오한과 미열이 있다. 더럭 겁이 났다. 만약 코로나 19에 걸렸다면 업무다 뭐다 조정해야 할 일이 만만치 않다. 나 때문에 동료들은 검사를 해야 하고, 재택근무에 들어갈 것이다. 생각하기도 싫은 상황이다. 다행히 저녁때쯤 열은 좀 내린 것 같다. 어제 왜 빗속을 걸었을까. 빗속을 걸으면서 연신 '음, 이것도 괜찮아' 했었는데 하루 전 기억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근무처를 옮기기 전에 써서 출판사로 보냈던 책이 얼마 전에 출간이 됐다. 그저 SNS에 책 나왔다고 신고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전작들보다 책이 덜 읽힌다. 조금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글이라는 것은 내 손을 떠나면 끝이다. 독자들이 읽고 판단한다. 10년 걸려 쓴 책도 덜 읽히는 것이 있고, 6개월 만에 후딱 쓴 책이 쉽게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한다. 열 권 넘는 책을 냈는데 그때마다 느끼는 허전함이 있지만, 이번에는 별 감흥이 없다. 물론 이번에 낸 책 <교사, 책을 들다>는 가장 심혈을 기울였다. 그 사실만은 독자들이 알아줘야 한다. 몇 년을 두고 천천히 읽힐 것이라 생각한다.
평생 읽고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고 자부했는데, 요즘 그것을 할 수 없다. 읽을 시간도, 쓸 여유도 없다. 바쁜 업무 중간중간 파고드는 우울의 실체는 바로 여기서 비롯한다. 친한 친구들과는 농담 삼아 발가락으로 글을 쓴다고 말한다. '이번에는 왼쪽 네 번째 발가락으로 썼다'는 식이다. 얼마간은 위악이고 얼마간은 SNS 글쓰기에 대한 스스로의 조롱 이기도하다. 더는 읽거나 쓸 여유가 주어지지 않고 그로 인해 우울이 지속되면, 그 발가락을 잘라 소시지와 함께 볶아먹으면 기분이 좀 나아지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