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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Nov 14. 2021

이런 글을 쓰게 될 줄은 몰랐다

모르고 살았던 그 긴 시간에 저절로 연민이 일어난다

지난번에 한번 언급한 것처럼 어떤 종류의 술도 마시지 못했었다. 평생 그랬다. 억울한 건지 다행인 건지는 모르겠다. 불면에 시달리던 어느 날에 후배가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자라고 해서 구입한 것이 '몬테스 알파 카베르쇼비뇽 2019'

저녁에 이놈을 홀짝거리기 시작한 지 3주째 되던 때에 한 병을 다 비웠다. 초심자라 맛도 구분할 수 없었지만 수확이 있었다면 어떤 종류의 술도 거부하던 내가 와인에 대한 거부감은 확실히 덜었다는 것이다. 이놈은 3만 원대였는데 다 마시고 나서 바로 마트에서 초저가로 파는 '투 버즈 원 스톤, 드라이 레드 2020'라는 것을 들고 와 벌써 3분의 2 정도를 마셨다.

포도 수확이 2019, 2020이면 사실 숙성이 덜된 것이라는데 너무 무식하게 마시는 것 같아 와인 관련 책도 사서 읽었고, 유명하다는 유튜브를 보면서 배우고 있다. 그저 이러다가 말지 푹 빠져들어 가산을 탕진하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지금은 살짝 억울한 기분이다. 인생의 잔재미를 모르고 산 느낌이다. 한편으론 이런 종류에 기대지 않고 오로지 내 마음과 몸으로 인생사 쓴 맛을 견뎌왔다고 생각하니 그 긴 세월에 저절로 연민이 일어난다.


글을 읽고 쓰는 것 외에 인생에서 나 자신을 위로하는 어떤 것도 만들지 못했었다. 우선 술을 못하다 보니 사교의 범위가 한정되었고 생활의 반경 안에 거의 혼자 있었다. 물론 그 혼자의 시간이 나를 글쓰는 사람으로 만들어 준 것이니 억울할지언정 후회는 없다.


아무튼 저거 얼른 다 마시고 세 번째 것을 구입하러 갈 생각에 조금 설렌다. 달 전만 해도 이런 글을 쓸 줄은 몰랐다. 



2년쯤 지나서 덧대는 글


하루 한 잔 와인을 마시며 와인 공부를 했던 6개월은 허무하게 끝났다. 와인 관련 책도 읽고, 유튜브도 보면서 뭔가 느껴보려 했으나 영 진전이 없고, 간혹 한 잔을 초과한 날은 오히려 잠까지 설치게 됐다. 때로 다소 비싼 와인을 구입하여 마셔보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 금방 오픈한 와인맛과 오픈한지 일주일 지나서 산화가 진행된 맛을 구분하지 못하는 구제불능의 능력이었다. 제법 큰 와인 전용 매장까지 다녀왔으나 그 중 할인을 해서도 10만원대에 샀던 와인은 지금 어디 박혀 있는지도 모르겠다. 더 공부할 이유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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