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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Jan 22. 2022

젊음 선망, 그 너머

시대적 소명이 된 젊고 건강한 몸에 대한 생각  

얼마 전 브런치에 쓴 <한국, 20대 남자의 정체성 https://brunch.co.kr/@webtutor/26>이란 글을 읽고 한 독자가 나를 20대로 착각하는 일이 있었다. 젊게 봐주는 데 내 쪽에서 기분 상할 리도 없고, 그렇게 댓글을 단 독자께서도 '응 미안, 착각이었네' 정도로 마무리되긴 했다. 그런가 하면 글을 쓰는 젊은 친구는 내 글에서 나이를 가늠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게 어떤 의미냐고 물었더니 좋은 쪽이라고 했다. 나는 젊지 않다.

물론 젊음은 상대적인 개념이라 나보다 더 연장자에 비하면 젊은 축에 속하겠지만, 통념상 젊지 않다. 그래서 젊은 작가의 코멘트를 이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당신의 글은 젊은 사람들이 읽기에 어색함이 없고, 최소한 꼰대스럽지 않다.' 나르시시스트의 기운이 살짝 감돌지만 그 정도의 치기와 자만도 없다면 글 쓰는 자의 도리가 아니다.   

잠시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소위 '연륜(年輪)'이라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글쓰기와 연륜은 어떤 관계가 있을지에 대하여도. 어떤 작가의 글에서 일종의 연륜이 드러날 수는 있겠지만 그 연륜이라는 것이 반드시 오랜 세월 쌓인 완숙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당신의 글에서 범접할 수 없는 연륜이 드러난다는 말을 들었다면 두 가지 방향에서 해석을 해야 한다. 하나는 오랜 세월 살아온 경험이 배어 완숙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말이요, 다른 하나는 글자 그대로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세월의 흔적은 그냥
 '연장자 느낌'이다.  

오랜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범접할 수 없는 인상이라는 것이 분명 있고, 그것은 글쓰기의 좋은 무기이지만 젊은 독자와 교감하는 데는 만만치 않은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한해 한해 더해지는 세월의 나이테를 거스를 수는 없다. 억지로 젊은 척해봐야 부자연스럽기만 할 것이고.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수밖에. 다만, 그 자연스러운 인정이 작가와 독자와 동시에 공명하는 것이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내친김에 나이 관련 에피소드를 하나만 더 말하겠다. 작년에 몇 분의 독자와 온라인에서 
만날 일이 있었다. 그중 한 분은 글로만 소통하다가 처음으로 만난 사이였다. 이분께서 말씀하시길 내 글을 꽤 읽었는데 본인보다 젊은 사람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물론 사실은 그 반대다. 이 사례, 그리고 앞의 두 사례를 보면 분명  (의식적으로 젊은 척하지 않으나) 내 글에서 젊은 기운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분 좋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글을 쓰는 사람은 누구나 특유의 느낌을 독자들에게 주기 마련이다. 몇 번에 걸쳐 들었던 '젊은 글'이란 말은 내 글쓰기의 또 다른 원천이 될 것임을 믿기로 했다.  



'젊음에 대한 선망'은 세대를 구분하지 않는 공통의 욕구 중 하나가 됐다. 누군가에게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라고 말하면 듣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한다. '최강동안'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최고의 찬사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외모를 젊게 가꾸는 것을 자기관리를 잘하는 것으로 여긴다. 안티 에이징을 해준다는 화장품들이 날개 돋친 듯 팔리고 부지런한 운동으로 근육질의 몸매를 갖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열심히 사는 것'으로 여겨진다. 

앞으로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 100세까지 사는 것이 흔한 사례가 된다고 하니 병들어 오래 사는 것보다는 누구라도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을 선호할 터이다. 주변 지인들의 관심사는 온통 젊음과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정보의 나눔이다. 좋은 영양제를 섭취하고 열심히 운동하여 건강한 신체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시대적 소명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이런 세태에 대하여 나는 전혀 불만이 없다. 오히려 내 불만은 그 반대 편에서 싹튼다. 

간혹 대화를 하다 보면 나이와 무관하게 현상유지와 안정희구적 성향의 사람들을 만난다. 나아가 마치도 거시적 삶의 고민은 누군가 능력자가 해줄 것이라 믿고 개인의 안온한 삶이 목표인 양 정체된 분들을 만난다. 그런가 하면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과 존중을 버리고 타인을 대상화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두 스타일이 상하관계로 만났을 때 최악의 조합이 탄생한다. 일방적 지시와 순응이 그것이다. 앞선 글에서도 몇 번 언급했지만 인류 문명의 진화를 이끌어 온 것은 현상유지가 아니라 전복에의 욕구였다. 순응이 아닌 의심이었다. 질문하지 않는 삶은 죽은 삶이다. 

세상에 대하여 적대감을 가지라는 말이 아니다. 끝없는 호기심과 의문이 세상의 진화를 약속한다. 아이가 태어나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 하루에 평균 100개 내외의 질문을 쏟아낸다. 물론 답변을 하는 사람은 주로 엄마다. (아빠들은 반성하라) 아이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대하여 질문한다. "이건 뭐야? 왜 그래?"와 같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반복한다. 뇌에 지식이 쌓이는 시간이며, 신체가 움직여 협응 하는 것을 익히는 시간이다. 이때 받아들이는 지식의 양은 가히 폭발적이다. 그러다가 초등학교를 거쳐 중학생이 되면 질문이 줄어들고 고등학생이 되면 아예 질문하지 않는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없어질 때 젊음도 끝난다. '애어른'이 넘치는 세상이 된다. 



몸을 젊어 보이게 하는 노력의 반은 마음을 젊게 하는 것에 투자하길 권한다.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라는 것이 아니다. 젊음이란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유지하고, 세상에 대하여 끊임없이 질문을 하며, 필요할 때 저항하는 삶이다. 세상의 모든 지식은 고정불변의 그것이 아니다. 언제든 새로운 지식이 탄생하고 사회적 합의를 거치면 공적 지식이 될 수 있다. 물론 그것도 '잠재성'을 가진다. 언젠가는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식의 잠재성을 믿을 때만 도전장을 내밀 수 있다. 


기성의 관념과 생각에 도전하는 것 또한 젊음의 특권이다. 안타까운 것은 기성세대들이 모진 세상을 살아온 탓에 가진 것을 나누지 않으려 한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니 젊은 세대는 좌절 속에서 '손해보지 않으려는 삶'을 택한다. 결국 세대 간에 적대감이 생기고 서로 다른 성별 간에 반목이 일어난다. 세상에 젊은 기운이 넘치게 하기 위해선 기성세대들의 노력도 필요하다.  그게 젊은 마음이다. 본인들의 육신만 젊게 유지하려 애를 쓰지 말고 주변을 살피고 함께 나누려는 마음에서 젊음이 나온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들이 그토록 소망하는 젊은 삶은 반쪽짜리다.  



커버이미지 https://www.dawn.com/news/117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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