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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Sep 21. 2023

소실점(消失點)

소실점(消失點)은 평행한 두 직선이 멀리 가서 한 점에서 만난 것처럼 보이는 점이다. 일상에서 만나는 소실점은 무수히 많다. 긴 복도의 끝, 도시의 거리와 빌딩 숲, 저 멀리 보일 듯 말듯한 지평선 너머... 물체가 멀어질수록 우리의 눈은 대상을 작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사라져 없어지거나 잃어버렸을 때 소실(消失)이란 말을 쓰는데, 그 너머에도 길이 계속됨을 알지만 지금, 여기서 보면 마치도 사라져 없는 듯한 느낌을 반영한 말이다.

나는 종종 소실점을 응시하면서 세상과 세상 아닌 것의 경계, 자연과 인공의 경계, 개인과 구조의 경계를 느낀다. 내가 20년 이상 몸 담았던 세계와 그리고 10년 동안 이어온 다른 세계 어느 쪽에서도 온전한 담지자로 자리매김하지 못했다. 두 세계를 동시에 이해한다고도 할 수 있지만 사실은 영원한 경계인이라는 숙명을 안고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체질적으로 양극단을 싫어하지는지라 균형을 잡으려 노력하지만 살아보니 참 쉽지 않았다.

세상이 각박하다. '좋은 합의'의 경험을 가지지 못한 시민들은 개인의 이해와 욕구에 빠져있다. 시민적 소양이 부족하다고도 볼 수 있지만 추격 산업화 과정을 숨가쁘게 달여오는 사이 모두가 마음의 여백을 상실한 탓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삶의 '룰'이다. 때론 법으로, 때론 관습으로 타자 사이에 놓이는 문화와 질서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질서가 형성되기 전에 우리에게 찾아온 물질적 풍요와 정신의 빈곤. 세상은 우리가 그런 문화를 누릴 자격이 있는지 묻는다.

무엇이 그 자리에 '있고', '없고'도 중요하지만 있고 와 없고 사이에 놓인 그 무엇에도 시선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 확실하게 있는 것과 확실하게 없는 것(그런 것이 현실에서 정말 가능한지도 모르겠다만) 사이의 공간이 더 넓었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는 소실점을 향해 바삐 달려가지만, 끝은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안다. 달려가보면 다시 저멀리 놓인 소실점이 보인다. 진부하지만 그렇게 반복하는 일상 속에 나라는 존재자가 있다. 하루의 순환은 시시하기 짝이 없지만, 그저 과정을 충실하게 살고 또 내일이 찾아오고, 어제 봤던 태양이 다시 떠오르고.
      

출근길에 만난 소실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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