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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Feb 14. 2024

같은 나, 다른 나

이른 아침 꼬리에 꼬리는 무는 잡생각에 빠졌다

이른 아침 잠에서 깼다. 침대 옆에 있는 작은 책꽂이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꺼내어 몇 페이지를 읽다가 다시 꽂아두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다. 맥신 그린, 한나 아렌트가 그렇게 내 손을 거쳐갔다.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 김재인>에 이르러서는 '이 책을 사두고 읽지 않았었지'라는 느낌이 먼저였다. 아무 곳이나 한 챕터 정도만 읽으면 되겠구나라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는데 뭔가 당황스럽다.

책 전반에 걸쳐 밑줄이 그어져 있고 군데군데 포스트잇도 붙인 것으로 보아 이 책은 내가 언젠가 읽었다. 신기한 것은 분명 내 글씨로 메모가 돼 있고 익숙한 줄 긋기가 있는데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처음 책을 샀을 때 빨리 읽기로 본 것 같은 느낌이 살아나긴 한다. 이 책(대상), 내가(주체), 언젠가(시간), 읽었다(행)는 것은 분명 내 의식과 행위가 결합하여 일어난 일인데도 나의 퇴화된 기억력이 그것을 되새김하는데 한계를 갖는 것이라고나 할까.

다만, 그 당시 읽었던 나와, 지금 기억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나는 같은 나일까 다른 나일까를 두고 다시 고민에 빠졌다. 매 순간의 나는 변함없는 나일까. 아니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전혀 다른 주체일까. 같은 나일 수도, 다른 나일 수도 있다. 말장난하는 것이 아니다. 같은 나라는 것은 같은 몸 안에 동일한 정체성을 가진, 하나의 식별번호(주민번호나 여권번호겠지)를 가진 유일무이한 나라는 것이다. 보통 인간의 고유성에 무게를 두는 분들은 '세상에 둘도 없는 오직 하나뿐인 나'와 같은 말을 하기도 하지.

한편, 영원히 '같은 것'은 없다는 것 역시 맞는 말이다. 모든 것은 변화하고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찰나의 순간일 뿐이다. 어제의 내 몸과 생각, 오늘의 내 몸과 생각은 같을 수가 없지 않은가. 몸의 세포는 끊임없이 분열하고 있고, 내장 속에 든 내용물이 다르며, 성장이든 퇴행이든 경험의 연속적 누적은 '모든 나는 다른 나' 쪽에 더 무게를 싣는다. 리적이든, 의식적이든 '오직 하나 뿐인 나'는 그저 강한 자아를 주문하는 사람들의 언술일지도 모른다.


가령 지금의 나는 진짜 나일까, 거짓 나일까 하는 질문도 흥미롭다. 보통 우리는 내면의 나와 외화한 나를 교차시키며 삶을 산다. 내면의 나가 진정한 나에 더 가깝겠지만 누구도 그것이 진짜 나라고 확신할 수 없다. 우리가 타인과 마주할 때 어느 정도는 가면을 쓴다. 사회적 얼굴이다. 만약 내 안에 꿈틀대는 순수한 나만의 욕구를 그대로 드러내면 살기가 힘들어진다. 결국 삶이란 또 다른 나를 끊임없이 창조하는 과정지도.

  -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한 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


결국 다양하게 변주되는 '나'는, 진짜 나에 가까운(그러나 결코 진짜일 수 없는) 나와 남이 봐주기를 바라는 나(사회적으로 연출된 나), 그리고 그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혼란스러운 내가 엉킨 실타래처럼 공존하고 있을 뿐이다. 오늘 아침 강의가 예정돼 있는데 그곳에서 나는 '강사'로 청중을 맞을 것이며, 오후에 있을 '00 운영위원회'에서는 위원장으로서 진행과 의사결정을 하는 또 다른 나로 변모해 있을 것이다. 퇴근 시간에 이르면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하는 전형적인 직장인이 모습일 것이고.

나에게 말을 거는 행위는 오직 인간만 할 수 있다. 나를 향한 끝없는 질문이 경험과 지식을 쌓이게 하고 성장하게 하는 원천이다. 나를 향한 질문이 멈추면 더는 성장도 없다. 나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를 향한 의지는 풍부한 삶을 열어가는 일종의 촉매제다. 내 안의 나와 남이 보는 나는 격렬하게 투쟁하면서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이것이 균형을 잡으면 교양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균형이 깨지만 특별히 자아가 강하거나 반대로 타인의 시선을 과잉 의식하는 삶이 된다.

사실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충분히 복잡한 삶이거늘, 이른 아침 꼬리에 꼬리는 무는 잡생각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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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이미지 https://isha.sadhguru.org/en/wisdom/article/what-is-e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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