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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Aug 28. 2024

내가 입증해야 할 쓸모

정년을 앞두고 잡생각에 빠졌다

1.

어제 오랜만에 외출했다. 혼자 버스를 타고 시내에 나간 것은 수술 이후 처음이다. 직장 동료들께서 정년을 앞두고 조촐한 환송의 자리를 마련해 주셨다. 모두들 나보고 얼굴이 좋아졌다고 얘기했는데 아마도 두 가지의 수술 후 음식을 가려서 적은 양을 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선물을 받고, 사진을 찍고, 음식을 먹고, 악수하고 헤어지는 과정은 이제 더는 직장인이 아니라는 의식적인 '의식' 같은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만감이 교차했다.


2.

정년 기념으로 페이스북 친구를 정리했다. 일종의 '유희' 방식이었다. 페이스북에서 친구를 맺고 끊고 하는 것 자체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가상의 네트워크 조정일뿐이다. 아마 정리된 분들 자신은 모르고 있을 것이다. 마침 페북에 '교류가 가장 적은 계정'을 보여주는 메뉴가 생겼다. 1차, 2차로 정리를 했는데 대략 250분 정도였다. 주기적으로 이렇게 몇 번 정리하다 보면 '관계의 밀도'가 조금은 높아질까.


3.

페북 소개란에 있는 잡다한 소개를 모두 지웠다. 브런치 소개란에는 워낙 간단히 적어서 손볼 것이 없다. 이제나 저제나 하다가 정년 3일 앞둔 시점에 그리 했다. 무슨 국장이니, 원장이니, 대표니 하는 직책들은 업무와 관련한 나의 정체성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선입견을 갖게 한다. 내 의도와 상관없이 여전히 과거의 나로 봐 달라는 요청으로 인식되기도 하여 더 남겨둘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 대신 두어 문장으로 자유를 얻은 기분을 소개란에 쓰고 싶다. 아직 참신한 문장을 만들지 못해서 일단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유지하기로 한다.


4.

책을 읽을 때 대체로 한 권을 붙들고 끝까지 읽는 편이지만 여러 권을 놓고 번갈아 읽는 병행 독서를 하거나, 시간이 허락하지 않을 경우에 엑기스 중심으로 발췌 독서를 하는 경우가 있다. 고백하건대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는 몇 군데를 발췌하여 읽고는 '완독'의 착각에 빠져있었던 책이다. 이번에 제대로 읽으면서 앞뒤가 연결되는 느낌이다. 그렇다 해도 내가 이 책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인식이 크게 바뀌진 않는다. 지극히 단순한 가설을 '매우' 다양한 사례로 설명하는 방식이라 결론은 변함이 없다.


5.

<총, 균, 쇠>와 더불어 대런 애쓰모글루/제임스 A. 로빈슨의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도 읽고 있다. 두 책이 관심사는 같은데 접근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 흥미롭다. 두 권 다 대충 읽었었는데 이번에 제대로 읽고 있다. <총, 균, 쇠>는 서울대학교 대출 1위라 하고, 이 책을 쓴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자신의 논거를 비판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 추천사를 썼다. 번역본 표지에서 이를 크게 부각하였다. 한국의 출판시장이 독자들에게 소구 하는 방식인데,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조만간 두 권을 묶어서 독서 후기를 쓸 것이다.  


6.

뇌종양 수술한 지 3개월, 담낭절제 수술한 지 2개월이 지나고 있다. 지금 미각은 대체로 돌아왔고, 미미하지만 후각도 돌아오고 있다. 목소리는 여전히 감기 환자의 그것이다. 미각과 뇌의 경험으로 후각도 상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정색하고 맡아보면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먹으면서 상상하면 뇌가 옛 경험을 불러일으켜 냄새 회로를 작동시키나 보다. 인간의 육신은 참으로 오묘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가끔 이런 이유로 '영성'을 생각한다.   


7.

매 식후에 집 주변을 걷다 보니 폭염 속에서도 바람골이 생기는 위치, 나무와 화초의 변화, 길고양이가 낮잠 자는 장소, 깨진 보도 블록, 아이들을 실어 나르는 유치원과 어린이집 차량들을 보았고, 익기 전에 떨어지는 감과, 매미의 사체, 매주 열리는 알뜰시장 등을 관찰했다. 단지를 벗어나 조금 더 '멀리' 걸어갈 날이 '멀지' 않았다.


8.

엊그제 퇴직 후 연금을 어떻게 받을지 결정했고, 교원공제회에도 들러서 그동안 부은 기금을 어떻게 활용할지 매듭을 지었다. 이제 9월부터는 '연금 생활자'가 된다. 도통 실감을 못하다가 막상 처리를 하고 나니 비로소 '활력 있는 세상에서 소외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자면 세상 이편에서 저편으로 밀려나는 기분 같은 것. 읽고, 쓰기를 게을리하지 말아야지 하는 '밝아오는 새마을' 같은 자기 계몽을 한다.


9.

브런치에 연재 기능이 있다. 자유로운 시간이 생긴 만큼 단편이나 에세이를 연재하려고 하는데 과연 누가 읽어줄지 의문이다. 브런치라는 곳은 출발 시점부터 지금까지 소소하고 일상적이며 착하고 계몽적인 글이 많이 읽힌다. '좋아요'가 많은 글들의 특징을 보면 이른바 '작품성'보다는 일상에서 찾은 소소한 감동의 순간을 쓴 글들이 많다. 그것이 독자들이 눈높이인지 브런치 편집진이 의도한 방향인지 잘 모르겠으나 나는 그런 글을 쓸 자신이 없다.


10.

함께 근무하던 동료로부터 전화가 왔다. 업무회의를 하려고 전국의 교육전문직들이 모였나 보다. 나를 아는 분들이 많아 스피커폰을 켜서 통화하겠으니 안부를 나누라고 한다. 과연 전국 각지의 전문직들이 안부를 물어 온다. 회복을 하게 되면 옛날처럼 강의도 하고, 책 이야기도 할 수 있을까. 내가 보여주어야 할 '쓸모'가 남아 있을까. 있다면 무엇일까. 자신이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솟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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