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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 Sep 28. 2022

환상의 복식조

후라이드 치킨

전업주부의 삶을 살고 있으나 나름 출퇴근의 개념을 갖고 움직이고 있다. 그러지 않고서는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잠자리에 들어 눈을 감는 순간까지 크고 작은 노동의 연속인 느낌이다. 실제로 그것은 그저 느낌에만 머무르지 않고 행위로도 이어지기 때문에 전업주부에게도 출퇴근의 개념은 반드시 필요하다.


가볍게 이른 저녁을 먹은 후 건조를 마친 수건을 꺼내 정리하는 것으로 집안일을 얼추 마무리하고는 퇴근을 했다. 문을 열고 환기를 하는 중이었으나 바람이 불지 않았고 건조기에서 방금 나온 수건의 열기까지 더해져 조금 더운 듯했다. 가볍게 샤워를 하고 내 방으로 들어가 노트북을 켜 패스워드를 입력한 순간. 전화벨이 울린다. 남편이었다.


'나 끝. 송내로 나와. 둘둘에 맥주 한잔하자. 어때? 둘둘 땡기지? 꽤 매력 있지?'


사족이 길게 붙는 걸 보니 이 남자 진심이구나.


남편의 저녁 약속이 있는 날이다. 명목은 저녁 약속이지만 그동안의 경험에 비추어 봤을  술자리까지 이어질 확률이 높았다. 아니 확률이 높은  아니라 저녁 약속은  술자리. 더구나 업무차 갖는 저녁 식사 자리라면 공식과도 같았다. 저녁 먹으며 간단히   했으니 공식이 깨진 것은 아니지만 이를테면 작은 변수가 생겼달까.  나름의 퇴근을 하고 방으로 들어가기  굳이 샤워까지 했던   순간 더워서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마음에 다짐을 했다는 얘기다. 남편이 없는 저녁 시간에 집중해서 뭐라도 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고작 패스워드만 입력하고 생각했던   글자로 쓰지도 못하다니. 아쉽기는 했어도 속이 상한다거나 짜증이 나지는 않았다. 그저 타이밍  끝내준다는 생각만 했을 .


집은 쉬는 곳이라는 생각이 강한 그다. 그러다 보니 퇴근을 늦게 하거나, 일찌감치 출근을 하더라도 회사 일을 집으로 갖고 들어오는 걸 끔찍이도 싫어하는데 요즘 들어 부쩍 집에서 일을 하는 시간이 늘었다. 퇴근 후 저녁을 먹고 이따금 산책을 나가더라도 순간순간 일 생각에 빠지는 남편을 보았다. 산책을 하며 머리를 비워야 하는데 그 시간마저도 일 생각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 그에게는 적잖이 스트레스가 되었을 터.


그런 그가 동네를 벗어난 곳으로 콜을 한다.

지금 남편에게 필요한 건 치킨이나 맥주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수위가 차올라 있는 스트레스 댐의 문을 열어줄 때가 되었다는 얘기다. 이른 저녁을 먹고 꾸덕한 초코로 디저트까지 야무지게 챙겨 먹은 후라 내 뱃속에 치킨이 들어갈 자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의 얘기를 들어줄 마음의 자리는 있으니 기꺼이 나가 그 수문을 여는데 일조를 해야겠다. 우리는 원팀이니까. 그렇게 옷만 갈아입고 핸드폰만 들고 집을 나섰다.


기다려!

내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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