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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 Jul 04. 2022

걱정은 가불할 필요가 없지

어복쟁반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 온 지 햇수로 6년 차. 남편도 나도 연고가 전혀 없는 이곳으로 오게 된 이유를 찾자면 살던 동네의 집값이 가파르게 오르고 있었지만 내가 살던 아파트는 한 동짜리의 정서향으로 동네 집값의 상승세에 맞춰 올라갈 거리가 전혀 없는 상태였고, 자녀의 학군을 걱정해 굳이 서울을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편의 직장이나 업무차 오가는 곳들이 서울에서보다는 이쪽이 가깝고, 다행히도 오빠가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이지.


조금 더 솔직해져 볼까. 그때 나는 그냥 '이사'가 하고 싶었다. 그 집에서 살면서 계속 힘들었던 기억밖에는 없었다. 반복되는 임신과 유산으로 정신이 너덜너덜해진 상태였고, 아무런 잘못도 없는 집이 싫어졌다. 환경을 바꾸고 싶었던 이유가 가장 컸지만 가장 뒤로 숨겨놓고 앞서 열거한 이유들을 전면에 내세웠던 거다.


그렇게 이사 온 이곳에서 난 이방인이었다. 아무래도 이 나이대 여자들의 최대 교집합인 아이가 없기 때문이겠지.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그래서인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새로운 사람들에게는 나를 설명해야 한다. 그냥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꼭 선을 넘는 관심을 보이는 이들이 있기 마련인지라 불편하다. 그런 이유로 처음 한두 해는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동네 꼬마들이 말동무의 전부였다. 지금이야 가벼운 안부를 묻는 어른인 이웃들이 있지만.


지난겨울이 막 시작될 무렵 P는 우리 동네에 집을 보러 온다고 했다. 임장까지는 아니어도 가끔 시간이 날 때 나들이처럼 집을 보러 다니는 걸 알고 있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동네에 왔으니 커피나 한 잔 마시자고 했다. 서너 군데 집을 보고 온 P는 동네를 맘에 들어했고, 특히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아파트 얘기부터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한참 수다를 떨고 헤어졌는데 잠시 후 P에게서 온 연락. '계약금을 넣기로 했어요.'


P는 나의 지독했던 난임 전(戰)의 전우다. 시술 정보를 공유하던 커뮤니티에서 알게 되어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그 시절 난임의 길을 함께 걷다 이제는 무자녀 부부의 길도 함께 걷고 있는 동지다. 알게 된 지 대략 7년 차지만 분기별로 한두 번 보거나 그렇지 못할 때도 많아 서로 존대하는 사이인데 동네 주민이 되는 거다. 심지어 같은 아파트 주민이라니! 조금 미안하지만 좋은데 불편하고, 불편한데 좋은 그런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남편에게 이런 내 마음을 털어놨을 때 마음은 알지만 걱정은 뒤로 미뤄두는 게 어떻겠냐고 했던가.


농담처럼 떡진 머리에 무릎 나온 츄리닝 입고 슬리퍼 신고 나가 만날 수 있는 동네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얘길 했었다. 그러면서도 정작 조금은 외롭지만 그보다는 고요하고 안정적이었던 생활이 흐트러질까 두려운 마음이 컸다. 하지만 간과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그런 마음이 없지 않을 거라는 걸. 어쩌면 나보다 더할 수도 있을 거라는 걸.


이웃이 된 지 어느덧 3개월. 동네 뒷산을 함께 산책하기도 하고, 김치나 과일을 나누기도, 받기도 한다. 특별한 약속 없이도 주말이면 두 부부가 만나 한 끼 정도는 식사나 술자리를 하고 있다. 무엇보다 부부가 함께 일상을 나누면서 사람들이 왜 먼 사촌보다 가까운 이웃이 좋다고 말하는지를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둘이었다면 쉽게 선택하지 않았을 어복쟁반을 앞에 두고 서로의 앞접시를 채우며 문득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의 과장을 더 해, 비록 한 집에 살지는 않지만 마음을 나누고 취향을 공유하며 식사를 같이하니 친구를 넘어 식구 같다는 생각도 잠시 했던 것 같다. 다시는 돌아보고 싶지 않았던 전쟁 같은 시절이 남겨 준 선물 같은 인연. 그래서 그 순간이 더 감사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남편의 말이 옳았다. 앞으로 다가올 일을 미리 준비하는 마음은 좋지만 괜한 걱정을 가불 하듯 땡겨서 할 필요는 전혀 없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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