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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 Jun 09. 2022

시아버지의 버킷리스트

오징어순대

"아버님, 오늘 무슨 날인지 아세요? 오늘이 아들 며느리 결혼한 날이예요. 다 듣고 계신 거 알고 있으니 얼른 눈떠서 축하한다고 해주세요."


내 얘기에 누워계신 시아버지의 발가락이 꼼지락거린다. 참 짓궂기도 하시지. 모두가 지쳐가는 새벽. 슬픔은 잠시 재워두고 적당한 농담이 오가는 시간이었다.


암으로 돌아가신 시아버지는 마지막 보름 남짓을 호스피스 병원에 계셨다. 용인에서도 한참 안쪽에 위치한 그 곳엔 시어머니가 상주하며 간병하셨고, 하나뿐인 며느리인 나는 주에 두세 번씩 인천에서 용인을 오가며 보조 간병의 역할을 했다. 


식사를 통 못해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던 분이 호스피스 병원에서는 오히려 컨디션도 좋아지고 입맛도 돌아 이것저것 드시고 싶은 게 생기기 시작했다. 하루는 짜장면이 드시고 싶다셔서 시누이가 짜장컵라면을 사들고 갔지만 이게 아니라고 쳐다도 안 보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역시 우리 아버님. 대충은 없으셔. 바로 다음날 병원 근처 읍내 중국집을 찾아 혹여 불지 않을까 면과 소스를 따로 포장해서 갖다 드렸는데 세상에나 그렇게 맛있게 드실 수가 없었다. 비록 양이 줄어 1인분을 다 드시진 못했지만 음식을 드시며 좋아하시는 모습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입이 써서 식사 하실 땐 늘 미간에 주름이 잡혀 있었고, 그것도 몇 숟가락 뜨지도 못하고 상을 물리시는게 일쑤였으니 그렇게 맛있게 짜장면을 드시는 모습은 조금의 과장도 없이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시어머니는 상주해 계시니 그날 이후로 드시고 싶은 음식들을 내가 공수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잣죽이 드시고 싶다셔서 태어나 처음으로 잣죽을 끓여 가기도 했고, 또 어느 날은 열무김치가 드시고 싶다셔서 친정엄마 찬스를 써 열무김치를 갖다 드리기도 했다. 하루는 오징어순대가 드시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 얘기를 들은 시누이가 '아니, 아빠는 평소 드시지도 않던 걸 괜히 말씀하셔. 나 살면서 아빠 오징어순대 드시는 걸 본 적이 없어'라며 그냥 하시는 말씀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도 했다. 식당에서 파는 오징어순대는 한 번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없었고, 내가 맛있게 먹은 곳이 없으니 직접 만들어 드려야하는데 당시에 나는 사실은 조금 귀찮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드시고 싶다는 시아버지의 말씀보다는 신경 쓰지 말라는 시누이의 말에 나도 모르게 더 무게를 두었던 것 같기도 하다.


며칠 후 일요일. 시아버지의 건조해진 발에 수분젤을 발라 드리고, 퉁퉁 부어있는 다리를 주물러 드리고 있었다. 다른 가족 없이 나와 단 둘이 계실 때 아바이 마을에 오징어순대를 먹으러 가지 못한 게 계속 아쉽다는 말씀을 한 번 더 하셨고, 그제서야 그냥 하신 말씀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고 아차 싶었다. 설사 생각 없이 하신 말씀이었어도 그렇게 지나쳐선 안되는 거였는데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모른 체한건지. 좋아하는 음식이어서라기 보다 오토바이 타고 부산 여행을 가고 싶었다고 하셨던 것처럼 일종의 버킷리스트였을 텐데 왜 그걸 외면했던 걸까.


월요일에 장을 봐 속을 만들었고, 다음날 화요일에 시아버지께 갖다 드릴 생각에 이른 아침부터 속을 넣고 찌고 있었다. 거의 다 완성되어갈 무렵 시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꾹꾹 눌려있지만 잔뜩 겁에 질린 목소리. 1인실로 옮겨야 할 것 같으니 가족들을 부르라고 했다는 거다. 아버님이 계시던 호스피스 병원은 말기 암 환자들이 있는 곳이다. 4인실이 기본이고 임종이 가까워지면 다른 환자들이 임종을 직접 보지 못하게, 그리고 남은 가족들이 충분히 애도할 수 있게 1인실로 옮기게 되어있다. 바로 옆 침대에 계시던 어르신도 1인실로 옮기고는 채 이틀을 넘기지 못하셨지. 그런데 시아버지가 그런 1인실로 옮기게 되었다는 얘기다. 엊그제 산소통 없이 숨 쉬는 연습도 하실 정도로 컨디션이 좋으셨고, 집에 가면 직접 보일러 공사를 해야겠다고 하실 정도로 삶에 대한 의지도 굉장히 크셨는데 병실을 옮긴다니 믿을 수 없었다. 남편에게 연락해 급하게 병원으로 갔고, 다음날 시아버지는 내 손을 잡은 채 마지막 숨을 마시고 더는 뱉지 못하셨다. 그날은 나와 남편의 결혼기념일 이었다. 


살면서 한 마디 싫은 말씀 없으셨고, 언제나 웃으며 반겨주시던 분이었다. 시어머니 만나기 전 친구들 얘기와 군대시절이나 힘들었던 젊은 시절 이야기들은 아들딸은 전혀 모르는 얘기다. 바쁜 며느리 끼니 걱정을 해주시고, 내가 급하게 입원할 땐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주셨으며, 당신 투병 중에는 내게 눈에 띄게 의지하시던 분. 


얼마나 지났을까. 그렇게 만들어 두었던 오징어순대를 냉동실에서 꺼내 저녁상에 올렸던 날. 찜기에서 꺼내 적당한 간격으로 잘라 접시에 옮겨 담고 상위에 올리는 순간, 어디선가 말을 걸어오는 기분이었다. 어깨를 톡톡 치며 시아버지와 함께 나눈 추억을 불러다 주는 듯했다. 남편과 나 서로가 기억하는 시아버지와의 지난 시간을 시덥잖은 농담과 함께 뱉어내고, 유난히 실없이 더 많이 웃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그리움이 슬픔의 얼굴을 하고 툭 튀어나올 거라는 걸 알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시아버지와의 마지막 밤처럼 슬픔은 재워두고 적당한 농담이 오가는 시간으로 보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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