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냉면
을지면옥이 재개발 때문에 위기에 봉착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갑자기 없어질지도 모르니 서둘러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그러니까 아주 자연스러웠던 거다. 그곳은 무려 '문 닫기 전에 가야 할 맛집'이라는 평을 받고 있지 않은가! 아, 물론 아예 문을 닫는 것이 아니라 이전을 하게 되는 거겠지만 오래된 노포가 어떤 이유에서건 이전을 하게 되면 어쩐지 지금까지와는 다를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할까. 아무래도 음식이라는 게 입에서 느끼는 맛 못지않게 그곳의 분위기가 주는 맛도 적지 않으니 말이다.
처음부터 평양냉면을 좋아했던 건 아니다. 때는 바야흐로 2015년의 봄. 남편과 함께 나간 나들이에 E가 합류했고, 여의도에서 만나 아직 이른 벚꽃을 구경한 후 냉면과 돼지갈비가 땡긴다는 이유로 봉피양에 갔다. 호기롭게 주문한 평양냉면이 나왔고 셋은 말없이 눈치게임을 하게 되었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지만 사정없이 흔들리는 동공이 말해주고 있었으니. 행주 빤 물. 정말 딱 그랬다.
안타깝게도 그 자리에 앉은 셋은 모두 평양냉면과의 첫 만남이었다. 기억을 되짚어가며 '면에 식초를 뿌리랬나?'하고 면을 들어 식초를 뿌려보기도 하고, '겨자를 어떻게 넣으랬지?'하고 겨자도 넣어봤다. 맛을 살리기 위해 뭔가를 더 추가할수록 기대했던 맛은 점점 더 산으로 가고 있었다. 더불어 우리의 흔들리는 동공은 멈출 줄 몰랐고, 결국 어느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젓가락을 놓고 말았다. 그래 봤자 냉면인데, 이렇게 진입장벽이 높을 수 있다니. 당혹스러웠다.
이후 한동안 평양냉면의 ㅍ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입 밖은커녕 생각조차 하지도 않았다. 그랬다. 분명 그랬었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정말 아무런 계기도 없이 평양냉면이 먹고 싶어졌다.
이게 무슨 조화지? 아니야, 아닐 거야. 말도 안 돼. 정신 차려!
먹고 싶은 마음을 부정했고, 그럴수록 이놈의 평양냉면 생각이 머릿속 깊이 박혀 떠나질 않게 되었다.
결국 동네 평양냉면 집을 찾았고, 맛은 걱정했던 것보다 괜찮았다. 아니, 솔직히 맛있었다. 이후 을밀대를 거쳐 우래옥, 을지면옥까지 다녀오게 된 거다. 어디 그뿐인가. 평소라면 절대 가지 않을 강남 한복판에 진미평양냉면을 일부러 찾아간 것은 물론이거니와, 집안 행사로 갔던 강화도에서는 이미 배가 부른 상태임에도 평양냉면 맛집을 발견하고 언제 또 올 수 있겠나 싶어 들어가 한 그릇 뚝딱 먹고 나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머릿속을 떠다니는 평양냉면에 대한 생각을 부정하던 시간이 아깝다가도 이제라도 제대로 알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한다.
아직까지 내 입엔 우래옥이 일등. 육향이 가득한데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담백한 육수가 정말 최고다. 을밀대는 우래옥에 비해 육수가 좀 약한 듯한데 면은 더 쫄깃하고, 을지면옥은 육수에서 기름기가 느껴졌지만 냉면에 올려진 고기가 정말 맛있었다. 뭐야, 나 지금, 가게 별 맛 평가를 하고 있니? 그 맛을 구분한다는 게 스스로가 놀랍다. 아 또 생각나버렸다. 정확히 지금 우래옥의 평냉이 먹고 싶다.
가끔 남편과 평양냉면을 처음 만났을 때의 그 혼란스러움을 떠올리며 우리 둘 다 지금은 평양냉면을 좋아하게 된 게 정말 다행이라고 이야기한다. 둘 중 누구라도 아직까지 평양냉면을 거부하고 있다면 우리의 먹는 즐거움 중 커다란 하나를 포기했어야 하는 것일 테니.
평양냉면을 극찬한 인사들은 많다.
그 가운데 배순탁 작가가 그랬다지.
'처음이라 그래 며칠 뒤엔 괜찮아져'
물론 며칠보다는 조금 더 긴 시간이 필요했지만 괜찮아지는 정도가 아니라 빠져버렸다.
아니, 더 이상 긴 말은 됐고, 일단 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