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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 Sep 27. 2023

명절 + 가스라이팅

명절에 그냥 있으면 심심하니까 쉬엄쉬엄 음식을 하시겠다는 시어머니께, "전 뭘 해갈까요?"라고 여쭈었다. 한 동네에 살 때야 명절 전날에 함께 모여 음식을 했지만, 거리가 멀어진 이후로는(그래봤자 1시간 30분 거리이지만) 음식을 나눠서 해가고 있다. 주로 추석에는 갈비를 재가고, 설에는 만두를 해가는 식이었다.


시어머니는 먹을 만큼 아주 조금만 할 거라며 아무것도 해 올 것 없다고 말씀하신다. 먹을 만큼 조금만이라지만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조금이 내가 생각하는 조금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몇 번을 여쭈고 갈비라도 재가겠다고 했지만 어머니는 한사코 그럴 것 없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제발 힘들지 않을 정도로, 심심하지 않을 정도로만 하시라 신신당부를 하고 결국 난 입만 가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8월 말에 결혼을 했으니 바로 얼마 지나지 않아 추석이 있었다. 첫 명절에 종일 전을 부치고 떡을 빚고 집으로 걸어오면서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날도, 그 이후로도 명절마다 남편은 괜히 미안해했고 저녁마다 주물러주느라 바빴지.


한두 해 지났을 때였나. 내가 해봤자 이미 다 준비되어 있는 재료로 전이나 부치고 추석엔 떡이나 만들고 설엔 만두나 빚는 게 전부인데, 힘들고 하기 싫다고 입내밀고 있기엔 어쩐지 오만가지 음식을 다 맡아하시는 시어머니께 조금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1년에 몇 번씩 제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명절 딱 두 번이 전부인데 어차피 하는 거 웃으면서 하자는 생각이 들었고 생각을 바꿔서인지 이후로는 종일 기름냄새 맡으며 전을 부쳐도, 허리를 숙여 떡을 만들고 만두를 빚어도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솔직히 힘들기는 했지만 그 안에서 재미도 찾을 수 있았는 게 맞겠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시니 몸이 편한 만큼 마음은 어쩐지 조금, 많이, 허전하다. 명절 기분이 나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이게 바로 명절 + 가스라이팅인가. 누군가는 팔자 좋은 소리 하고 앉아있다고 할지도 모를 일이지만.


결혼하고 맏며느리도 아니면서 맏며느리 역할을 다 하시고, 평생을 명절마다 일주일씩 음식을 하며 살았다 보니 이젠 안 하면 심심하고 허전하다고 하시는 말씀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지금도 전화를 드려보니 두 가지 김치를 담그셨다고 하고, 내일은 녹두 전이나 '쉬엄쉬엄' 부치고 게장이나 담그려고 하신단다. 아이고 어머니.


난 그저 해주시는 음식 맛있게 먹고, 어깨와 다리 좀 주물러드리고, 싸주시는 김치 감사히 받아오는 것으로 이번 명절 며느리 몫을 다 해야겠다.


오늘 담그셨다는 시어머니의 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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