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과 불행 그 사이에서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내용은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한 이론임을 밝혀둔다.
행복해지는 법을 알려면 우선 행복이 무엇인지 명확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국어사전에서는 행복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
여기서 핵심은 만족이다. 우리 스스로의 삶에 만족할 때, 우리는 행복하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 삶에 만족을 느낄까? 삶에 만족을 느끼기 위해서는 또 무엇이 만족되어야 할까? 나는 다음의 두 가지가 만족될 때 인간은 비로소 삶에 만족하며 행복을 느낀다고 생각한다.
매슬로의 욕구 계층 이론을 아는가. 인간의 욕구를 여러 단계로 분류하고 있고, 하위 욕구의 충족이 다음 단계의 욕구를 향한 동기부여가 된다는 이론이다.
인간은 여러 욕구가 만족되어야 행복할 수 있다. 배가 고픈데(식욕) 먹지 못하면 불행한 것처럼, 생리적인 욕구부터 자아실현과 같은 상위 욕구까지 어떤 방식으로든 충족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때때로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를 포기할 때가 있다.
일 때문에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족과의 시간(애정 욕구)을 포기하기도 하고, 책임과 희생에 대한 불안과 걱정 때문에 아이를 낳는 것(생식 욕구)을 포기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자살(생존 욕구)을 선택하기도 한다. N포 세대라는 말이 나올 만큼 이런 욕구의 불만족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모든 욕구는 만족되려면 감각기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가장 기본적인 오감(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뿐 아니라 마음의 감각인 감정과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여러 인간의 감각이 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낄 수 있기에 욕구가 만족되고, 또 만족되었는지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감각을 느끼고자 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욕구일 수도 있으며, 모든 감각을 풍부하게 사용할수록 행복해진다. 예를 들어보자,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시각) 바람의 온기를 느끼고(촉각) 향기로운 꽃 향기를 맡으며(후각) 아름다운 새소리를 듣고(청각) 있을 때 우리는 행복함을 느낀다. 또한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도(미각), 사랑하는 사람과 키스를 나눌 때도(촉각, 감정) 행복함을 느낀다.
그렇다면 감각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바로 나의 의식이 지금 이 순간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하기 싫은 일을 하느라 딴생각하기 바쁘다면, 출퇴근 시간이 지루해 스마트폰만 보고 있다면 우리의 의식은 다른 곳에 있게 된다. 당연하게도 의식이 지금 이 순간에 있어야 나의 감각기관이 활성화되고 나를 포함한 주변의 모든 것들에 집중하며 더 섬세하게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내 주변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존감이 낮고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을 믿지 못하고, 스스로 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으며 자신의 존재 자체에 수치심을 느끼고 항상 불안해하고 있었다. 예전의 나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기에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인지 고민하게 됐다.
앞에서 행복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욕구가 만족되어야 하고, 욕구가 만족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감각이 만족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또한 감각이 만족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식이 지금 이 순간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방금 설명한 바와 같이 행복을 위해서는 감각을 풍족히 사용할 수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는 감각을 교란하는 빠르고 편리한 현대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는 쉽지 않다. 실생활의 예시를 살펴보자.
편리함이란 좋은 것일까? 편리한 것은 좋고 불편한 것은 나쁜 걸까? 어떤 사람은 당연히 그런 거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모든 것에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이면이 존재하고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치면 많은 부작용이 있다는 것이 내가 살아오면서 깨달은 이치 중 하나이다. 지나친 편리함은 사람을 그것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만든다. 의존이 심해지고 중독되게 되면 그것은 내 자유를 빼앗겼음을 의미한다.
지금 가장 크게 우리의 자유를 빼앗고 있는 대표적인 물건은 스마트폰이다. 스마트폰은 굉장히 편리하다. 이제는 컴퓨터 앞에 앉지 않아도 어딜 가지 않아도 은행 업무를 볼 수 있고 필요한 정보를 검색할 수 있으며 재미있는 영상을 볼 수도 있고 SNS나 메신저로 전 세계의 누구와도 쉽게 소통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지나치게 편리하여 우리가 항상 스마트폰 액정화면만 보게 만들었다. 하루 중 나의 의식이 스마트폰 안에만 존재하는 비율이 굉장히 높고 이는 내 감각을 마비시킨다.
감각을 느끼는 것도 편향되어있다. 기껏해야 재밌는 것을 보고 웃거나 불합리함에 대한 기사를 보고 분노하는 것이다. 이것조차도 경험하지도 않았고 보지도 않았는데 믿고 분노하며 감정과 에너지를 낭비한다. 거짓된 감정은 결코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없다.
나는 커피와 차를 좋아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마시는 방식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나 티백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커피와 차를 마신다는 것은 한 번의 명상과도 같다. 모든 감각을 사용하며 즐기는 여유로운 한잔은 황홀한 행복감을 선사해준다. 차보다는 커피를 예로 드는 것이 더 이해하기 쉬울 것 같으니 커피로 예를 들어 보자.
동네 로스터리 카페에 가서 인사를 나누고 바 테이블에 앉아 그날의 날씨와 기분에 따라 취향에 맞는 원두를 선택한다. 주인장이 핸드드립으로 내려주는 동작에 집중하며 그 동작의 결과로 풍겨오는 다양한 향들을 맡는다. 커피가 나오면 향을 맡아보고 찻잔의 따뜻한 온기를 손으로, 커피의 온기를 입술로 느끼며 한 모금 마신다. 맛을 음미한다. 주인장과 이런저런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니 많은 사람들이 오늘 하루도 살아남기 위해 각성제로써 커피를 마신다는 것을 발견했다. 살기 위해 마신다니,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한 커피라는 각성제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스마트폰과 같이 창조물인 그들에게 자유를 억압당하고 노예로 전락한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볼 문제다.
또 한 가지 감각을 마비시키는 주된 범인은 바로 환경이다. 회색 빛의 빌딩 숲에 많은 차들과 매연 그리고 북적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 몸은 자극을 피하기 위해 감각을 닫는다. 복잡한 출퇴근 시간이 되면 경적을 울리며 차로를 마구 변경하는 차들을 보면 그 운전자들의 마음이 얼마나 분노로 가득한지 알 수 있을 정도다.
반대로 여행을 떠나 한적한 자연의 숲을 거닐며 새소리를 들으면, 마음은 평화를 찾고 여유를 갖게 된다. 타인에게 너그러워지고 자연스럽게 정신을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게 된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들은 자연을 좋아한다. 많은 이들이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지금 이곳 현실에서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감각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일지도 모른다.
종종 후회와 고민, 불안, 걱정, 공포 등 여러 가지 이유와 현재 삶의 불만족으로 인해 우리의 의식은 과거나 미래 또는 공상 속에 갇힐 때가 있다. 또한 스스로도 왜 그런 삶을 살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할까. 내가 생각하는 사회적 원인을 몇 가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산업 혁명 이후의 달라진 사회 체계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이데올로기가 등장했는데 세상을 더 좋게 만들고자 하는 취지였겠으나, 뭐든 과도하면 부작용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자본주의는 지금의 우리 사회를 깊숙이 지배하는 이념이자 사회 체계다. 경제 관점에서는 큰 성장의 동력이 된 것은 분명 하나 돈이라는 추상체가 실존하는 자연과 생명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니는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자존감 브레이커: 가치 역전 현상
주변에 맹목적으로 돈을 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들은 돈을 벌어서 무엇을 할지 구체적이지도 않으면서 돈이 없어서 자신들이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돈이 있다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사람보다 돈이 더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럴지언데 자존감이 남아나겠는가.
백수 8개월 - 2편에서도 이야기한 적 있지만 돈이란 그저 우리의 노동력과 시간을 환산하여 가치를 부여한 사회적 약속에 불과하다. 실존하는 것이 아니며 실제적 가치는 그 가치를 부여한 우리들 자신과 우리가 사용한 시간에 있다.
하지만 현대의 산업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에 의한 소비를 통해 유지되는 체계이기 때문에 소비 중심의 생활을 할 수밖에 없고, 고도로 분업화된 전문가 사회이기 때문에 어떤 일이든 돈을 통해 남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이런 사회 속에서는 돈의 가치가 사람보다 우위에 서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돈이 없다면 당장이라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리니 말이다. 자존감이 낮은, 즉 자신의 가치를 부정하는 상태에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복잡성과 스트레스의 증가
문명화된 사회일수록 사람들의 스트레스는 높아지게 된다. 세상이 점점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장사를 하여 생계를 이어가고 싶다면 거리로 나가 내가 만든 물건을 팔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은 법적 규제를 알고 따라야 하며 많은 사회적 관계들을 이해해야만 가능하다. 또 그것을 위해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세상이 복잡해짐에 따라 많은 문제가 발생했고 그로 인해 많은 규제들이 필요해진 것이다.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많은 제약으로 이루지 못할 뿐 아니라 점점 복잡해지는 체계 안에서, 나이가 든 사람일수록 어울리지 못하고 그들의 농후한 지혜는 빛을 보지 못한다. 그저 사회적 약자가 될 뿐이다. 이 시스템 안에서 대다수는 그렇게 되어갈 것이며 당연히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어렵다.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 하는 일
위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하고 싶은 일을 하기에는 너무 많은 제약이 따른다. 법적 제약은 물론이거니와 소비 중심의 사회에서 돈을 벌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을 투자해야만 한다. 일명 가성비가 좋지 않기 때문에 하고 싶은 일보다는 돈을 벌기 위해 해야 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욕구 불만족의 상태에서는 행복하기 어렵다.
자본주의의 진실을 알고 싶다면, EBS에서 방영한 다큐 프라임 - 자본주의 1부. 돈은 빚이다를 보길 추천한다.
이번에는 우리를 현재에 살 수 없게 하는 조금 다른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태어난 아기의 인생은 수정 직후부터 생후 3년까지에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정이 이루어진 후부터 태아기에 그 아기가 가진 기질이 형성되며, 생후 3년에 걸쳐 자아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아기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트라우마를 남길 수 있는 시기가 바로 출산이다.
사람들은 종종 나와 다른 사람들이 많이 행하고 있고 지금까지 당연하게 알아왔던 것들이 진실이고 옳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믿을 때가 있다. 이것은 시대적 세뇌다. 현재의 산부인과 위주의 출산 문화는 인간의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불과 얼마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유일한 출산 방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출산을 역사적 컨텍스트 안에서, 그리고 아기와 엄마의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지금의 출산 문화가 굉장히 폭력적이라는 것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태어날 때의 기억이 없기 때문에 아기들이 당연히 태어날 때의 기억을 하지 못하고 그에 대한 감정도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틀리다. 이 기억은 점차 자라면서 표면적으로 사라질 뿐 무의식 어딘가에 남아 우리의 남은 생에 영향을 줄 것이다. 이때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 사람도 간혹 발견된다. 일본에서 태어날 때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한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칼이 찌르듯 들어와서 흰옷을 입고 안경을 낀 사람에게 다리를 붙잡혀 엉덩이를 맞고 엄마의 뱃속에서 나왔을 때 무서워서 울고 있었더니 이번에는 고무를 입에 끼워서 고통스러워서 울었어요."
세상에 무지하고 그저 연약한 신생아에게 행해진 이런 폭력성 때문에 아기는 삶의 막연한 공포와 두려움이라는 트라우마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리고 이 아기는 성인이 되어서도 항상 삶이 불안하고 무섭고 자신을 믿지 못하고 무언가에 의존해야만 하며 불행하다. 자기가 왜 그런지도 모르고 살아간다. 너무 어릴 때 박혀버린 감정 하나가 나를 지배하는데, 너무 은밀하고 너무 대범하여 알 수 도 없고 어찌할 도리도 없다.
아기의 입장에서 생생하게 출산의 현장을 느껴보고 싶다면 프레드릭 르봐이예 저서의 폭력없는 탄생을 읽기 바란다.
폭력성을 지닌 현대의 음식 문화도 우리의 번뇌를 가중시키는 중대한 역할을 한다. 음식에 폭력성이 있다니 이해가 되는가? 음식으로 인한 폭력은 바로 우리 스스로에게 향한다.
우리 몸을 이루는 세포들은 매번 죽음과 재생을 반복한다. 하지만 재생을 위해서는 세포를 만들 재료가 필요하다. 우리가 섭취한 음식은 소화되어 잘게 분해되고 그렇게 생성된 성분들이 세포를 만들고 몸의 여러 활동을 위한 재료로 사용된다. 당연하게도 질 좋은 음식을 섭취할수록 내 몸의 질이 높아진다.
또한 음식은 우리의 육체뿐 아니라 정신적인 측면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들이 존재한다. 우리들이 현대에 흔히 먹는 음식들을 예로 들어보자.
흰 쌀, 흰 밀가루 등의 정제 탄수화물과 자극적인 음식은 혈당 변화를 크게 만들어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 수 있으며, 가공육에 많이 사용되는 질산염은 예민함과 감정 기복에 영향을 준다. 패스트푸드, 튀긴 음식, 가공육, 당분이 많이 포함된 간식, 고지방 유제품 등을 많이 먹으면 우울증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사실 우리 몸은 자신 만의 것이 아니다. 수많은 미생물들이 함께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는 생태계다. 이 생태계의 균형이 깨졌을 때 육체적 정서적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한다. 미생물들은 우리의 정서와 관련된 많은 호르몬들을 생성한다. 따라서 위에서 예를 든 음식들과 여러 현대의 음식들이 이런 미생물의 불균형을 초래하면 몸과 마음에 막대한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런 폭력성의 무서움은 단기간에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아 눈치채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20년이 지난 후에야 암이 발병하고, 평생 비염으로 숨조차 자유롭게 쉬지 못하면서 이에 적응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다면 병의 원인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 그저 감각이 깨어있어 내 몸에 일어나는 변화를 스스로 인지하고 무엇이 문제인지 생각해야 이런 폭력성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을 것 이다.
You are what you eat
당신이 먹는 것이 곧 당신이다
이전에 백수 8개월 - 외전을 통해 출산과 음식에 대한 두 가지 논점에 대해 기술한 적이 있으니 필요하다면 참고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