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여인이 사랑을 기억하는 법
셀린 시아마 감독의 작품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두 여성의 사랑을 다룬 작품입니다. 18세기 여성들의 동성애를 다룬다는 것은 몇 관객들에게 피로감 또는 고루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를 다루는 방식이 다른 영화처럼 과격하거나 급진적이지 않으며, 오르페우스 신화의 새로운 해석, 그림이라는 플롯 안에 담아내어 표현하기에 많은 관객들에게 찬사를 받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아름답고 우아한 사랑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연출적으로 톺아보겠습니다.
"돌아보지마"가 아닌 "돌아봐줘"
셀린 시아마가 말하는 오르페우스 신화의 새로운 해석.
우선, 이 영화가 다루는 오르페우스 신화의 재해석에 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오르페우스 신화는 서양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오르페우스 신화는 음악의 신 오르페우스가 아내를 지옥에서 구하는데 실패하는 이야기입니다. 아내를 지옥에서 구하기 위해서 어두운 동굴을 지나는 동안 뒤돌아보면 안 된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에우르디케를 명계에서 구하지 못하는 이야기로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 대한 주된 해석은 죽음의 절대성, 후회, 두려움과 같이 인간이 뒤를 돌아보는 행위에 새겨진 내적 감정에 초점을 두어 해석되는 편입니다.
그러나 셀린 시아마의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위와 같은 일반적인 해석과 결을 달리합니다. 오르페우스 신화를 음악의 신 오르페우스의 실수 또는 후회로 해석하지 않고 에우르디케가 스스로 이별을 택하는 주체적인 사랑 이야기로 해석하는 것이 매우 독특한 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두 주인공을 신화 속 주연들과 빗대어 이야기합니다. 오르페우스가 마리안느, 에우르디케가 엘로이즈로 매칭되죠. 그리고 이 영화는 오프페우스 신화의 전통적인 해석인 후회라는 감정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주체적인 결정이 억압되었던 18세기 여성의 성장사로 서사의 초점과 범위를 확장합니다. 오르페우스의 실수로 에우르디케가 명계로 끌려가 이별한 것이 아니라 아내 에우르디케의 결정으로 사랑의 마침표를 스스로 찍었다는 이야기로 치환되니까요.
즉, 이 영화에서 음악의 신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본 이유는 아내 에우르디케가 스스로 청했다는 해석인 것이며, 이는 꿈속 장면 및 두 인물이 이별하는 장면과 자연스레 연결됩니다. 그 장면에서 엘로이즈는 "뒤돌아봐"라고 말하죠. 그리고 이 작품에서 말하는 지금보다 억압된 18세기, 주체적 결정을 위해 발버둥 치는 주인공의 서사와도 자연스레 연결됩니다.
영화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린다는 행위를 통해 나를 기억하라는 의미로까지 확장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 영화가 담고 있는 퀴어적, 제1파 페미니즘의 성격으로 감상하는 것도 좋지만 오르페우스 신화를 비틀어 필히 당도할 이별을 '후회'가 아닌 '나를 기억해줘'로 치환하는 부분이 매우 재밌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표현하는 여러 장면(꿈 속에서 신부 드레스를 입은 엘로이즈), 대사(부엌에서 신화를 읽으며 나누는 대화) 들에서 이러한 내용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마침표를 스스로 찍고, 나를 기억해줘라는 의미를 새기는 연출들은 인상적이었습니다.
화가와 뮤즈, 오르페우스와 에우르디케, 마리안느와 엘로이즈
상대를 그릴 때 카메라의 태도
제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화가와 뮤즈라는 관계가 전복되는 이야기로 다가옵니다. 화가와 뮤즈라는 관계는 그리는 자와 그려지는 자 입니다. 이는 능동-피동 관계로 해석되며 작 중 등장하는 설정인 정략결혼, 연주자와 청자, 명계에서 아내를 구하는 오르페우스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에우르디케와도 등치되는 관계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우리가 익히 알던 능동-피동 관계를 상호작용 관계로 비틉니다. 엘로이즈가 그림 그리기를 참여하는 순간부터 말이죠.
우선 영화 초입,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그리기 위해 관찰하는 순간부터 이 작품의 메인 플롯인 그린다는 행위에 우리는 집중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카메라가 엘로이즈를 클로즈업으로 관찰하기 시작하니까요. 엘로이즈를 몰래 그리기 위해서 뒷모습, 교차한 손의 모양, 눈망울의 형태 등등 차분히 뜯어보게 되죠.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이렇게 상대방을 차분히 그리고 자세히 바라보는 행위라는 것을 카메라의 시선만으로 담아냅니다. 그러한 시선으로 담기는 것은 사랑하는 이를 바라보는 모습은 이런 모습이었지..라는 감상을 줍니다.
그리고 극 후반 일방적인 화가와 뮤즈 관계에서 서로 그림에 대해 의논하며 그림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피사체였던 엘로이즈가 화가로 전환되는 순간으로 변모합니다. 이때 카메라는 이전처럼 엘로이즈만을 화면에 담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는 시점 쇼트, 동등한 카메라 높이, 프레임 안에 두 인물을 지속적으로 함께 담기 시작하며 두 인물의 관계의 변화상을 담아냅니다. 더 이상 화가와 뮤즈라는 능동-피동 관계가 아닌 함께 협업하는 주체적인 관계로 발전하는 것이죠.
때문에 프레임 안에 혼자 담기기만 했던 엘로이즈는 함께 초상화를 완성하며 한 프레임에 담기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카메라 연출을 중점으로 바라봐도 흥미로운 작품으로 다가옵니다.
이 영화의 메인 플롯은 '그림'입니다
바라보는 행위에 새겨진 애정
'왕이 죽었다', '왕이 슬픔에 빠져 죽음에 이르렀다.' 이는 흔히 말하는 스토리와 플롯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연속되는 이미지가 언어인 영화에서 플롯은 '이미지 간 연결이 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메인 플롯은 그림을 그리는 장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화가와 뮤즈, 마리안느와 엘로이즈, 오르페우스와 에우르디케와 같이 능동-피동관계를 전복시키는 이 영화의 이야기는 상대를 그릴 때 보이는 클로즈업과 이를 연결하는 편집을 통해 완성됩니다.
무언가를 그리기 위해서는 대상을 유심히 관찰해야만 합니다. 극 초반 엘로이즈를 훔쳐보는 뛰어난 촬영 장면이 대표적인 장면이죠. 위 장면에서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보지 못할 때는 우리도 그녀를 볼 수 없고,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볼 수 있을 때, 관객들도 그녀를 관찰할 수 있죠. 이를 절묘하게 담아낸 촬영은 감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사랑이 시작되는 설렘의 감정까지 담아낸 좋은 장면이었습니다.
그림으로 그대를 영원히
이 영화에서 뒤돌아보는 것과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상대를 기억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기억하는 행위는 곧 상대를 그리는 행위죠. 빈 캔버스에서 피사체가 되며 시작했던 이 영화는 비발디 사계-여름 3악장을 듣는 엘로이즈를 응시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됩니다.
엘로이즈가 마리안느를 추억하며 슬픔, 희열, 기쁨 등의 여러 감정이 교차하던 엔딩 장면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그 장면은 곧 마리안느가 다시금 엘로이즈를 오래도록 바라보는 것이며, 그녀를 다시금 그리는 장면으로 다가옵니다. 이는 과거 그녀를 그리기 위해 측면에서 훔쳐보았던 옛 장면들과 겹쳐 보이니까요.
때문에 이 영화의 엔딩은 다시금 그녀를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그리는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바라보는 것은 신화 속 두 연인처럼 필연적인 이별에서 마지막으로 그녀를 기억하기 위함이었을지 않을까 합니다. 이들에게 바라보는 행위는 서로를 기억하고 사랑한다는 의미였으니까요.
★★★★★(10)
그린다는 것은 그대를 사랑한다는 것